6월 민주 항쟁: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틀 이름 및 스타일 정리
136번째 줄:
{{빈 문단}}
=== [[6월 26일]] ===
[[파일:A leaflet for National Peace March against Jeon Du-hwan Government.jpg|thumb섬네일|[[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된 1987년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 전단]]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 시위가 전개되었고 3,467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6만 명의 경찰 병력이 배치 되었지만, 6·10민주항쟁의 3배가 넘는 시민들이 국민평화대행진에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를 저지하기로는 역부족이었다. 전국의 파출소 29곳, 경찰서 2곳, 민정당사 4곳이 불탔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이날의 평화대행진에 6·10 대회 때의 3배가 넘는 100만 명이 참여했다고 추산했다.<ref>길윤형, 김소희,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7/06/021003000200706070663027.html “벅찬 승리였고 시린 상처였다”], 한겨레신문</ref> 특히나 회사원들, 넥타이 부대들의 시위 참여로 6월 항쟁은 학생 항쟁에서 시민 항쟁으로 변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찰력은 명백히 한계를 드러냈고, 국민들의 행진을 막을 수 있는 물리력은 계엄군밖에 없었다. 6월 항쟁은 고립된 한 도시에서가 아니라, 전국 동시다발로 진행되었다. 일선을 비워둔 채 전군을 시위 진압에 투입하지 않는 한 6월의 행진을 제압할 방안은 없었다.<ref>유시춘 등,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501051723031&code=210010 (실록 민주화운동)84. 6·18 최루탄 추방대회와 6·26 평화대행진], 경향신문</ref>
 
154번째 줄:
 
== 항쟁 이후 ==
[[파일:이한열 추모행진 집회.jpg|thumb섬네일|300px|9일 낮 고 이한열 군의 운구행령을 따라 서울시청앞까지 추모행진을 벌인 수십만명의 학생 시민들이 낮 1시경부터 시청앞 광장에서 대중 집회를 가졌다.]]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의 [[6·29 선언|6·29 수습 선언]] 이후 직선제 개헌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제6공화국 새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거쳐 [[1987년]] [[10월]]<ref>[[1987년 대한민국 국민투표|10월 27일에 국민 투표]]</ref>,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