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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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파일:Pura Besakih Sunrise 01.jpg|thumb섬네일|240px|[[브사키 사원]]]]
 
[[파일:Temple uluwatu ag1.jpg|thumb섬네일|240px|[[울루와뚜 사원]]]]
=== 선사 시대 ===
기원전 2000년경에는 대만에서 기원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기원전 1 세기경부터 교역을 통해 [[인도]]와 [[중국]]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동손 문화]]의 영향을 받은 구리 북(銅鼓)이 발견되는 등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면서,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문명이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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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 식민 지배와 발리 르네상스 ===
[[파일:Gamelan Laras Slendro Si Ketuyung.jpg|thumb섬네일|left|240px|[[가믈란]]]]
19세기 말이 되면서 당시의 불어닥친 제국주의 열풍의 유행 아래서 네덜란드가 발리의 식민지화를 추진하여, 각 지역의 왕가를 무력으로 정복하였다. 먼저 [[1846년]] 발리 쪽의 난파선을 끌어올린다는 요청을 빌미로, 발리 동북에 군대를 상륙시켜 [[부레렝]](Buleleng)과 [[젬브라나]](Jembrana)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침공을 진행하여, [[1908년]]에는 마지막 남은 [[클룽쿵 왕국]]을 멸망시키고, 발리 전체를 식민지화 시켰다. 그러나 이때 발리 왕족, 귀족들이 보였주었던 ‘[[뿌뿌탄]]’(Puputan, 무저항 대량 자결)으로 네덜란드는 국제적인 비난을 받게 되었고,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는 현지 전통 문화를 보전하는 정책을 내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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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네덜란드의 문화보호 정책을 배경으로 발리는 "마지막 낙원"이라는 캐치 프레이즈가 "반신 누드 부녀" 그림과 함께 서양에 소개되었다. 특히 그레고르 클라우제의 발리 사진 컬렉션에 매료된 서양 예술가들이 섬으로 오게 되었다. (1924년 바타비아 - 싱아라자 간의 정기선 취항이 시작되었다). [[1932년]]에 발리를 방문한 [[찰리 채플린]]은 "발리 행을 결정한 것은 형 시드니였다. 이 섬은 아직 문명의 손길이 미치고 있지 않고, 섬의 아름다운 여자들은 가슴을 드러내고 있다는 이런 이야기가 나의 관심을 자아냈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이전의 관광객 수는 [[1920년대]]에는 연간 1,200 - 3,000명 정도였으나, [[1930년대]] 중반에는 연간 3만명에 이르렀다고 하는 통계도 볼 수 있다.
 
[[파일:Monkey Forest Street of Ubud 200507.jpg|thumb섬네일|right|240px|예술의 마을 [[우붓]]]]
이렇게 서양인의 영향을 받아 1930년대 발리는 "발리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여 현재의 관광 중심이 된 음악 (가믈란 등), 무용 ([[레공]], [[께짝]] 등), 회화의 양식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중심에 있던 것은 우붓의 영주였던 ‘초코르다 스카와티’ 일족에 초대받은 독일인 화가이자, 음악가인 [[발터 스피스]](''Walter Spies'')이다. 그의 집으로 [[멕시코]]의 화가 [[미겔 코바루비어스]](''Miguel Covarrubias'')나 [[캐나다]]의 음악 연구가 [[콜린 맥피]](''Colin McPhee''), 인류 학자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 오스트리아 작가 비키이 바움(Vicki Baum) 등이 모였다. 그들은 대체로 "진정한 발리"를 지향하여 "발리의 발리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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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과 독립 ===
[[파일:NgurahRai.png|thumb섬네일|150px|left|독립영웅 구스티 응우라 라이]]
1942년 2월, 일본군이 발리를 침공하였다. 네덜란드 군이 주둔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에 거의 피해없이 발리 해전에서 승리했고 불과 20일만에 네덜란드 군은 항복했다. 처음에는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다고 반겼지만, 네덜란드의 식민지 지배와 다를 바가 없었고, 전쟁으로 인한 현지인들의 징발로 인해 불만이 증폭되었다. 그 당시 육군 장교였던 [[구스티 응우라 라이]]는 발리인들과 함께 자유군을 결성했다. [[1944년]] 중반에 자바와 연계한 항일운동이 전개되었고, 같은 해 9월, 인도네시아 독립을 용인하는 코이소 성명이 발표되었고, [[1945년]] 4월 [[수카르노]]가 발리에 찾아와 인도네시아 독립의 필요성을 연설하였다. 민족 단합의 기운이 갑자기 높아지면서 7월에 "소순다 건국 동지회"를 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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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하르토 정권 ===
[[파일:Balinese dancers.jpg|thumb섬네일|200px|우붓의 전통 무용수]]
수하르토의 개발 독재 시대에 들어가면서 발리는 간신히 평온을 되찾는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정부의 세심한 배려의 하에 외화 획득을 목표로 하는 관광 개발이 시작되었고, 1970년대 이후 세계적인 관광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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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파일:Bali-Ubud 0704a.jpg|thumb섬네일|upright|left|발리의 신전]]
발리섬은 [[알프스-히말라야 조산대]]에 속하는 소순다 열도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섬의 서쪽에는 발리 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선다 열도에 속하는 [[자와 섬]]이, 동쪽에는 [[롬복 해협]]을 사이에 두어 [[롬복 섬]]을 포함한 누사 트가라 제도가 있어, 띠모양의 열도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 발리 해협의 가장 좁은 곳은 3km 정도이며, 발리의 해안에서는 [[자와 섬]]의 자형을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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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형 ===
[[파일:Bali Labeled.png|thumb섬네일|220px|발리의 지형]]
발리섬은 면적이 5,633km로 섬의 북부를 동서로 화산맥이 달려, 발리 [[힌두교]] 신앙의 성산으로 여기는 아군산(해발 3,142 m)이나 [[킨타마니 고원]]으로 알려진 바트르산(해발 1,717m) 등 많은 화산을 가지고 있다. 근처에는 온천이 용출 하고 있다. 이 화산대의 활동은 발리섬의 극히 비옥한 토양을 가져다 주었고, 때로는 사람들에게 재해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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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후 ===
[[파일:Climate Diagram Denpasar.PNG|thumb섬네일|220px|[[덴파사르]]의 기우도<ref>각 수치는 1961년 - 1990년까지 30년간 평균。[[세계기상기관]] (WMO)의 데이터</ref>]]
발리섬 주변은 사바나 기후에 속하며, 계절은 북서 계절풍이 부는 우기(10월 - 3월)와 남동 계절풍이 부는 건기(4월 - 9월)로 명확하게 나뉜다. 이 계절풍에 의한 거센 파도는 해상 교통에 지장을 주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외침으로부터의 보호막이 되기도 하여 독립성을 유지한 역사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건기의 사이는 동부, 북부를 중심으로 물부족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며, 우기에는 하루에 2 ~ 3시간 [[스콜]]이 내린다. 심할 때에는 30cm의 집중호우가 내릴 때도 있으며, 도로가 침수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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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
[[파일:Bali 0720a.jpg|thumb섬네일|right|240px|의식을 준비하는 여인들]]
[[파일:Ubud Cremation Procession 5.jpg|thumb섬네일|right|240px|장례행렬]]
발리의 지역 사회는 [[발리 힌두교]]에 근거한 유일한 전통 양식 ([[아닷트]])에 따라 생활이 영위되고 있으며, 네덜란드 식민지 이후에도 현대 행정 (디나스)과 병존하는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반자르]]와 [[데사]]라는 지역 사회를 기반으로 다양한 노동 작업 ([[고통 로용]])이나 종교 의례가 공동으로 거행되었으며, 반자르에서 추방은 "죽음"와 사형선고와 마찬가지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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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발리 힌두교}}
[[파일:Offerings on the sand, Kuta Beach, Bali.JPG|thumb섬네일|left|150px|모래 위에 바치는 제물(쿠타 비치)]]
=== 종교 ===
2005년 통계에 따르면 발리섬에는 3,151,162 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 이슬람교가 많은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발리섬 사람의 92%는 지역화된 [[힌두교]]인 [[발리 힌두교]]를 믿는다. 그 뒤로는 [[이슬람교]](5.7%), [[기독교]](1.4%), [[불교]](0.6%) 순이다.(2003년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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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
[[파일:DewiSri.jpg|thumb섬네일|150px|곡식의 여신 듀이스리]]
[[파일:Bali-Danse 0707a.jpg|thumb섬네일|150px|[[레공]] 춤]]
섬 남부를 중심으로 토지가 비옥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발리 사람들은 여유로운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아침, 저녁 각각 2,3 시간 일하면서 나머지 시간을 회화, 조각, 음악, 무용 등의 창작 활동에 종사하여, 미술, 예술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 발리섬은 공연 예술, 그림, 조각 등 예술로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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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과 춤 ===
[[파일:Bali-Danse 0721a.jpg|thumb섬네일|left|240px|[[께짝 댄스]]]]
발리의 [[가멜란]] 음악은 매우 발전되어 있다. 라마야나 같이 힌두교의 서사시를 표현한 춤도 있다. 발리의 춤으로 유명한 것 가운데에는 펜뎃, 레공, 바리스, 토팽, 바롱, 께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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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극 ===
[[파일:COLLECTIE TROPENMUSEUM Wajangfiguur voorstellende Bima TMnr 15-954-92.jpg|thumb섬네일|200px|발리 와양]]
그림자극(와양)은 발리의 사람들에게 시공을 초월한 지식과 교양의 원천이다. 즉, 예능으로서 와양, 그것을 감상하는 인간의 의식의 바닥에 점점 쌓여가서 잠재적인 가치 체계가 된다. 와양 스토리는 주로 고대 인도의 서사시다. '라마야나’, '마하바라타'이고, 인형을 조정하는 다랑은 [[산스크리트]]의 지식을 가진 특별한 승려인 프단다가 맡는다. 또한 [[1990년대]] 후반 무렵부터 와양 첸 브론으로 불리는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가민된 와양이 젊은이들의 인기를 끌게 되어, 전통적인 와양은 쇠퇴 추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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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예 ===
[[파일:Bali 0701a.jpg|thumb섬네일|200px|발리의 수공예 조각]]
발리 전통 공예의 기원은 화장 등의 종교 제례 때 바치는 제물로부터 시작되었다. 따라서 정교함이 엿볼 수 있는데, 목각은 장식 공예로 문이나 기둥 등의 건축물, 동상, 소품, 연극 가면 등으로 일상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오늘날 볼 수 있는 동물의 사랑스러운 조상은 역시 "발리 르네상스" 시대에 태어난 것이다. 천 공예로는 이불과 수건 등 폭넓게 사용되는 민속 의상 [[사롱]](''sarong''), 직물에서는 "자바 더"라고 불리는 [[바틱]](''Batik'' 및 이캇트 천)이 잘 알려져 있다. 그 밖에 추르크 마을의 은제품 역시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공예품 제작자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독창성을 살린 예술 창작 활동에 힘쓴다기 보다는 그 작품을 판매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 회화 ===
[[파일:バリ絵画8242202.jpg|thumb섬네일|200px|left|발리의 미술품]]
발리의 회화는 색채가 풍부하고 치밀한 묘사가 특징이다. 발리 회화의 기원은 16세기후반 [[마자파힛 왕조]] 무렵으로, 왕궁을 장식하기 위한 회화로 발전하여 '라마야나', '마하바라타'와 힌두교의 많은 신들이 소재가 되어 왔다. 당시부터 전해지는 발리 회화의 기법은 〈카마산 스타일〉이라 하고, 기본적으로 5색 (검정, 흰색, 노랑, 파랑, 갈색)을 사용하여 원근을 이용하지 않고 평면적으로 그려진 것들이 많다. 카마산 마을에서는 전통적인 기법의 계승과 함께 새로운 감성을 가미해 발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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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광 ==
=== 남부 해변 리조트 ===
[[파일:Sanur 200507-2.jpg|thumb섬네일|240px|사누르 비치]]
발리섬의 관광 개발은 1969년 [[응우라라이 공항]]의 개항에 의해 단체 관광을 위한 대규모 개발이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판타이 사누르(Sanur)와 꾸따(Kuta)가 관광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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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도 덴파사르 ===
[[파일:Dempasar 200507-4.jpg|thumb섬네일|240px|주도 덴파사르]]
주도인 [[덴파사르]]는 현지 사회의 상업 중심지며, 현지 주민이 다니는 쇼핑몰(발리 쇼핑 센터, 마타하리 등), 시장(수공예품, 직물 시장, 파사르 쿤바사리와 중앙 식품 시장의 파사르 바둔 등 ), 레스토랑, 공원이 많이 있다. 기타, 발리 주 국립 박물관과 뿌뿌탄 광장 등의 관광지가 있다.
 
=== 우붓 산악 지대 ===
[[파일:Bali Urwald SvG.jpg|thumb섬네일|left|260px|우붓 호텔]]
한편, 산의 측면으로 가면, 산중턱의 리조트 지역이 있는 발리의 모습을 볼 수있다. 그 대표적인 지역이 우붓이다. 이 "예술 마을"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부터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양질의 발리 댄스와 발리 예술, 바틱 등 염색 기술, 대나무 제품 등 전통 문화와 민예품 등 여러 가지를 볼거리를 제공한다. 우붓 남쪽에는 목조 마을 데사 마스도 번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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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 동부, 북부 ===
[[파일:Candidasa Lagoon 200507-3.jpg|thumb섬네일|240px|[[다사]]]]
또한 섬의 동부, 북부 해안 지역에서도 [[1970년대]] 이후 비치 리조트로 조용히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지역이 있다. 대표적인 것은, 발리 동부 다사, 아메드(Amed), 발리 북부의 로비나(Lovina) 비치, 발리 북서쪽의 쁘무트란(Pemuteran) 등이다. 이 지역은 [[스쿠버 다이빙]], [[스노클링]]의 명소로 유명한 해변이 여러 개 있다. 그 중, 발리 동부 뚤람벤(Tulamben)에서는 미국의 수송선 리버티 호가 일본군의 공격으로 해저에 침몰한 유물이 남아 있어 다이버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발리 동부는 아궁 및 [[브사키(Besakih) 사원]이 섬 북쪽에 위치하며, 오래된 도시 싱아라자(Singaraja) 항구도 위치하고 있다.
 
== 교통 ==
[[파일:Denpasar national terminal&old tower.jpg|thumb섬네일|220px|[[덴파사르 국제공항]]]]
=== 외부 ===
발리의 관문인 [[응우라라이 공항|덴파사르 국제공항]]이 섬 남부 (꾸따 바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카르타]], [[인천]], [[싱가포르]], [[시드니]], [[런던]] 등 각지와 연결되어 있다. 개항 당시에는 발리까지 직항이 없었지만, 곧 해금되어 많은 관광객이 직항 노선과 자카르타 경유 항공편을 이용하게 되었다. 또한 인도네시아의 섬들을 연결하는 국내선 항공편의 편수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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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 교통 ===
[[파일:Bemo, Gianyar 200507.jpg|thumb섬네일|left|220px|[[베모]]]]
섬 내부에서는 철도가 운행되고 있지 않고 있으며, 대부분의 이동은 자동차를 이용하게 된다. 발리는 해안을 따라 주요 지역을 연결하면서 일주하는 도로가 있다. 내륙에서는 특히 섬의 방대한 부분을 차지하는 남쪽 사면의 하천이 남북으로 깊은 골짜기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그것 따라서 도로가 남북으로 나 있고, 동서로 달리는 도로는 별로 없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도로와 마을의 각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는 거의 포장이 되어 있어 자동차의 통행에 문제가 없다. 중산층 이하 현지 주민의 주요 교통 수단은 오토바이와 베모이다. 또한 오제라는 오토바이 택시와 돗카루라는 조랑말 마차도 일부 지역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