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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西晉時期北方各族分布圖-ko.png|thumb섬네일|400px|[[영가의 난]] 전야 때 각 유목민족의 분포. 가장 북쪽의 남색이 탁발선비.]]
{{몽골의 역사}}
'''탁발선비'''(拓跋鲜卑)는 [[선비 (민족)|선비]]의 한 지파이다. [[화북]] 지역에 [[북위]] 등 왕조를 세웠다. [[돌궐어]]로는 '''탑가치'''({{llang|otk|𐱃𐰉𐰍𐰲|Tabgač}})라 했다.
 
[[단석괴]]의 통일선비가 붕괴하고 다시 분열된 선비들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탁발선비이다. 3세기 후반 [[탁발역미]]가 [[내몽골]] [[후허하오터 시|호흐호트]] 분지로 남하하여 거기를 근거지로 하였고, 4세기 초 탁발역미의 손자 [[탁발의이]]와 [[탁발의로]]가 [[서진]]을 멸망시킨 [[흉노]]와 [[유연 (나라)|유연]]과 싸워 대선우(大単于)를 칭함으로써 음산 일대의 선비의 통령이 되었다. 탁발의로는 [[병주 (중국)|병주]]자사 [[유곤]]에게 상건하(桑乾河) 상류, 구주산(句注山) 이북의 영토를 요구하고 대동분지를 포함하여 [[만리장성|장성]] 너머의 땅을 영유했다. 이와 같이 [[북아시아]]의 유목민족이 화북의 영토를 요구한 것은 탁발선비가 처음이다. 그리하여 탁발선비는 화북의 중국인과 정치적 군사적 문화적으로 직접적인 관계를 가졌다.
 
315년 박발의로는 [[대 (오호 십육국)|대나라]]를 건국하고 그 왕을 칭하였다. 호흐호토 분지 성락(盛楽)에 도성을 쌓고 여기를 북도(北都), 대동분지 평성(오늘날의 [[산서성]] [[다퉁 시]])에도 도성을 쌓고 남도(南都)로 삼아 수도로 정하였다.
 
이처럼 탁발선비의 지배가 화북에 미치면서 탁발선비는 중국 스타일의 성을 쌓고 제도도 중국풍으로 바꾸었다. 그 뒤 일시적으로 분열 상태에 빠졌지만 [[탁발십익건]]이 왕이 되자 성락 남쪽에 새로운 성을 쌓고 중국인 관료를 기용한 뒤,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꾸는 등 국가의 제도를 중국식으로 바뀌었다. 그 뒤 일시적으로 [[전진 (오호 십육국)|전진]]이 화북의 패권을 쥐었던 적이 있지만, [[동진]]과 항쟁하다 이내 몰락하고 386년 탁발십익건의 손자 [[탁발규]]가 대나라의 국화를 위나라([[북위]])로 개명, [[황제]]에 즉위했다. 북위가 [[북위 태무제|태무제]] 시기에 화북을 통일하고 강남에서는 [[유송]]이 동진을 대체함으로써 중국에는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