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마르 (조지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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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치 초기와 첫 번째 결혼 ==
[[파일:Vardzia Chapel fresco.jpg|thumb섬네일|180px|left|타마르(왼쪽)와 게오르게 3세(오른쪽). 바르지아에 있는 [[성모 안식]] 교회에 있는 잔존하는 가장 오래된 타마르의 초상화. 1184~1186년경.]]
타마르는 6년동안 그의 부친이 죽던 [[1184년]]까지 섭정했고, 이어서 단일 군주가 되었으며, 조지아 동부의 [[쿠타이시]] 근교에 있는 [[겔라티 수도원]]에서 즉위식을 치렀다. 그녀는 비교적 강력한 왕국을 승계했지만, 고위급 귀족들에 의해 조장된 중앙집권을 흐트려트려 놓으려는 풍조는 가라 앉을 줄을 몰랐다. 타마르의 계승을 반대하던 심상치 않은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부친이 그들을 억압했던 정책에 대해 반기를 들어 올렸지만, 새로운 군주의 취약점, 즉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들을 더 부추겼던 것이다.<ref name=" Eastmond-108"/> 그녀 전까지만 해도 조지아에서는 여성 군주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일부는 타마르 여왕의 적법성에 대해 의문을 품었지만,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어린 점을 이용해 그녀의 결점이 오히려 그들의 대자치권을 확고히 해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ref name=" Eastmond-108"/> 타마르의 영향력 있는 고모인 [[루수단 (조지아의 데메트레 1세의 딸)|루수단 여왕]]과 [[조지아의 모든 가톨리코스-파트리아르츠|조지아의 가톨리코스]] 미차엘 4세 미리아니시제의 열정적인 도움은 조지아 왕국을 승계한 타마르 여왕을 합법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ref>Lordkipanidze (1987), p. 135.</ref> 그녀는 가톨리코스 미차엘의 도움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대법관]]에 임명했고, 그리하여 미차엘은 성직과 세속의 공무 체계 양쪽 모두에서 수장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ref name="Suny-39">Suny (1994), p. 39.</ref>
타마르는 그녀의 부친인 게오르게 3세가 그에게 도전하던 귀족들을 엄중 처벌하는데 도움을 줬던 그의 부친이 임명했던 사람들 중에서 낮은 신분 태생의 [[조지아의 킵차크인|조지아인화 된 킵차크인]]인 쿠바사스 보안관의 해임을 촉구하기도 했다.<ref name="Khazanov-49"/> 게오르게 3세가 비천한 신분으로의 숙명을 벗어날 수 있게 해준 그의 무명의 시중들 중에 한명은 그 때에 새로운 의회인 ''카라비''를 조직해 의회만 따로 떨어져 심사숙고 하여 정책을 결정했던 그렇게 왕권을 제한하려는 투쟁 중에 있었던 귀족 단체들과 부유한 시민들을 이끌던 [[재무 담당자]] [[쿠틀루 아슬란]]이었다.<ref name="Suny-39"/> 타마르가 쿠틀루 아슬란을 체포하고 그의 추종자들을 구슬려서 항복하게 함으로 "봉건 [[입헌 정치]]"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ref name="Khazanov-49"/> 하지만, 상류층 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타마르의 첫 행보는 완전히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녀는 [[교회 회의]]를 통하여 가톨리코스 미차엘을 해임시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귀족 의회 ''다르바지''가 국왕 법령의 승인권을 주장했다.<ref name="Suny-39"/> 그녀의 첫 번째 남편 마처도 귀족들에 의하여 강요된 [[루스족]] 왕자 [[유리 보골류프스키]]였다.<ref name="Suny-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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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결혼 ==
[[파일:Tamar of Georgia, Q'incvisi mural.jpg|thumb섬네일|150px|타마르 여왕을 묘사한 [[킨츠비시 수도원]]에 있는 13세기 벽화]]
1187년, 타마르는 허구헌날 술에 쩔어 사는 알코올중독과 [[변태 성욕|변태 성행위]]로 고발당해 [[콘스탄티노플]]로 떠난 유리와의 이혼 승인을 위해 귀족 회의를 설득했다.<ref name="Lordkipanidze-142"/> 타마르의 권력 성장이 억제되기를 너무나도 바랐던 몇몇 귀족들의 원조로, 유리가 두 번의 쿠테타를 일으키도록 했지만, 실패했고 1191년 이후에는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었다.<ref name="Khazanov-49"/> 두 번째 남편은 여왕이 스스로 선택했다. 그는 [[알라니아|알란]] 왕자 [[다비트 소슬란]]이었다. 18세기의 조지아의 학자 [[바쿠시티]]는 그를 11세기 초반의 조지아 왕 [[조지아의 게오르게 1세|게오르게 1세]]의 후손이라고 기술했다.<ref>Alemany (2000), p. 321.</ref> 유능한 군사 지휘관인 다비트는 타마르의 주요 지지자가 되었고 유리의 그늘에서 모략을 일삼던 반란 귀족들을 무찌르는데 도움이 되었다.<ref name="Lordkipanidze-143">Lordkipanidze (1987), p. 143.</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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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 정책과 군사 작전 ==
=== 무슬림 주변국들 ===
[[파일:Caucasus 1213 AD map de.svg|thumb섬네일|1213년 조지아와 주변국들]]
[[파일:Vardzia (17).jpg|thumb섬네일|바르지아의 폐허가 된 동굴마을]]
일찍이 타마르는 그녀의 왕권을 강화했으며 다비트 소슬란, 므크하르그르드젤리, 다른 귀족 가문들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고, 그녀는 그녀의 부친의 팽창주의 외교 정책을 다시금 펼치게 되었다. [[엘디구지드|아제르바이잔의 아타베그]], [[시르반샤흐]], [[아흘타샤흐]]와 같은 [[셀주크 제국]]의 지역 통치 후계자들의 분투와 접목된 조지아에서의 왕조에 대한 반복적인 불화는 타마르의 증조부 [[이베리아의 다비트 4세|다비트 4세]] 시대와 그녀의 부친 게오르게 3세의 통치 기간 동안에 둔화되었다. 그러나, 조지아인들은 타마르의 통치 하에서, 그녀의 통치 기간에서 제2의 10년 동안 두드러지게 다시 활기를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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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레비존드와 중동 ===
[[파일:Iviron Aug2006.jpg|thumb섬네일|아토스 산에 있는 [[이비론 수도원]], 조지아 왕권의 혜택을 받은 그리스도교 문화의 주요한 중심지]]
[[파일:MinzarHamatzleva ST 04.jpg|thumb섬네일|예루살렘에 있는 [[십자가의 수도원]], 과거에 조지아의 수사들이 거주했으며 타마르 여왕의 후원을 받았다.]]
타마르의 통치 기간 중에 주목할 만한 사건은 1204년에 [[흑해]]에서 [[트라페주스 제국|트레비존드 제국]]의 건국이이었다. 그 왕국은 [[알렉시오스 1세 (트라페주스)|알렉시오스 콤네누스]]와 그의 동생 [[다비트 콤네누스|다비트]]가 조지아 대군의 원조를 받아 해체된 [[비잔티움 제국]] 북동부의 [[폰토스|폰티크]]에 설립한 나라였다. 알렉시오스와 다비트는 타마르의 친척으로 조지아 왕실에서 추대된 일시적인 비잔티움 왕자들이었다.<ref>Tamar's paternal aunt was the Comnenoi's grandmother on their father’s side, as it has been conjectured by Toumanoff (1940).</ref> 타마르의 공식 역사가에 따르면, 조지아의 트레비존드 원정의 목적은 비잔티움의 황제 [[알렉시우스 4세|알렉시우스 4세 안겔루스]]가 조지아의 여왕이 [[안티오키아|안티오크]]와 [[아토스 산]]에 보낼 봉헌금 선적을 강탈한 것에 대한 처벌이었다. 그러나, 타마르의 폰티크 원정은 콘스탄티노플에 대항하는 [[서유럽]]의 [[제4차 십자군]] 전쟁을 기회로 활용해 조지아의 서남쪽의 바로 인접한 영토에 왕조의 연대에서 소외된 콤네노이에 의해 건국된 우방국을 두려는 그녀의 열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ref>Eastmond (1998), pp. 153–154.</ref><ref>Vasiliev (1935), pp. 15–1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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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 시대 ==
=== 봉건 군주 ===
[[파일:Tamar's fresco at Betania.jpg|thumb섬네일|left|150px|타마르 여왕, 베타니아에 있던 13세기 초반의 프레스코화 조각]]
타마르 시대의 정치와 문화적 위업들은 그녀 이전의 조지아 역사에서는 선례가 없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업적들은 깊고 복합적인 과거의 역사와 선대가 그 뿌리를 이뤘다. 타마르가 성취한 업적들은 대부분 그녀의 증조부 다비트 4세(즉위. 1189~1125)의 개혁과 가장 직접적인 연관이 있고, 좀 더 간접적으로는 11세기의 처음 10년 동안에 조지아의 여러 왕국들과 공국들의 정치적인 통합을 계획하고 실행했던 [[타오의 다비트 3세|다비트 3세]]와 [[조지아의 바그라트 3세|바그라트 3세]]의 단합된 노력이 기반이 되었다.<ref>Rapp (2003), p. 413.</ref> [[중세 시대]], 그녀의 통치 기간에서 마지막 해 쯤에, 조지아 왕국의 국력과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타마르의 왕국 영역은 북부와 중앙 아르메니아에서의 충성스러운 자차리아드 관리 체제와 봉신인 시르반과 동맹인 트레비존드를 형성하므로, 북쪽의 [[볼쇼이캅카스 산맥|대캅카스]] 산마루에서 부터 남쪽의 [[에르주룸]]까지 그리고 북서쪽의 [[지기 (조지아)|지기]]에서 동남쪽의 [[간자]]까지 확장되었 판-팝카스 제국을 이뤘다. 동시대의 조지아 역사가는 타마르를 "폰투스의 바다(흑해)에서 부터 [[고르간]]의 바다([[카스피해]])까지, [[스페르 (조지아)|스페리]]부터 [[데르벤트|데르벤드]]까지 그리고 [[하자르족|카자리아]]와 [[스키타이|스키타이아]]의 이쪽에서 저쪽까지"의 모든 영토의 주인이라며 격찬했다.<ref>{{언어링크|ka}} Shengelia, N., [http://www.nplg.gov.ge/ic/DGL/work/SIN/sin%203+/nawili%201/5/2.htm#_ftnref75 საქართველოს საგარეო პოლიტიკური ურთიერთობანი თამარის მეფობაში] ("Foreign Relations of Georgia during the reign of Tamar"), in Melikishvili (1979).</ref><ref>Salia (1983), pp. 177–190.</ref>
 
국왕의 칭호는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그 칭호는 조지아 왕국 영역의 전통적인 구획들을 좌지우지했을 뿐만 아니라, 이웃한 영토들에서도 조지아의 제왕 패권을 강조하는 새로운 성분을 포함했다. 따라서, 주화들과 헌장들은 그녀의 이름으로 발행되었으며, 타마르는 "하느님의 뜻에 의하여, [[압하스 왕국|압하지아]],<ref>중세 시대에 "압하지아"와 "압하지아인"이라는 용어는 보통 서부 조지아 전역에서 모든 실제적인 용도들이 포함된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 용어는 15/16세기에 조지아 왕국이 분열된 후에야, 오늘날 [[압하스 공화국|압하지아]]와 그 지역에 사는 [[:en:Abkhaz people|민족 집단]]에게 한정되는 새로운 의미로 다시 사용되었다. [[:en:Vasily Bartold|Barthold, Wasil]] & [[:en:Vladimir Minorsky|Minorsky, Vladimir]], "Abkhaz", in ''[[:en:The Encyclopaedia of Islam|The Encyclopaedia of Islam]]'', vol. 1, 1960.</ref> [[카르틀리|카르트벨리아]],<ref>"카르트벨리아인"은 현시대의 조지아인들이 그들 스스로를 자칭하는 용어이며, 본래는 [[고전 고대]]와 비잔티움 자료들에서 조지아의 [[카르틀리]]-[[캅카스 이베리아|이베리아]]의 중앙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였다. 9세기 경에, 조지아의 문학가들은 "카르틀리"의 의미를 종교, 문화, 언어에 의해 하나가 된 중세 조지아의 다른 지역들까지 넓혔다. Rapp (2003), pp. 429–430.</ref> [[아르란]], [[카케티]], [[아르메니아인]]들의 왕들 중에 왕이이며 여왕들 중에 여왕이시고, [[시르반샤흐]]와 [[샤한샤흐]]이시며, 모든 동방과 서방의 [[전제 군주]]이시고, 세계와 신앙의 영광이시며, [[메시아]]의 투사이신 분"으로 확인된다.<ref>Lordkipanidze (1987), p. 157.</ref><ref>Eastmond (1998), p. 135.</ref><ref>Rapp (2003), p. 422.</ref>
[[파일:GEORGIA, Kingdom. T’amar. Queen Regnant, 1184-1213. Æ Fals (26mm, 6.65 g, 3h). Dated Year 420 of the Paschal cycle (AD 1200).jpg|thumb섬네일|타마르의 [[모노그램]]이 특징인 조지아어와 아랍어가 새겨진 구리 동전 (1200년)]]
그 여왕은 단 한번도 독재 권력을 휘두른 적이 없으며 귀족 의회는 계속 기능했다. 그러나 타마르 자신의 명성은 그리고 조지아의 [[봉건 제도]] 번역서인 ''파트론크모바''의 확장본에서는 그녀는 해체된 왕국에서 온 더 강력한 왕조의 왕자들을 유지시켰다고 한다. 그때는 조지아 봉건주의 역사에서 고전시대였다.<ref>Suny (1994), p. 43.</ref> 그들에게 이전에 대부분 알려지지 않은 지역들에의 봉건제도 시행 이식 시도는 반대없인 통과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1212년에 조지아의 북동 국경의 [[프코비]]와 [[체즈족|디도]]의 산악 지방 사람들 사이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바네 므크하르그르드젤리가 이끄는 군대와의 3달 간의 격렬한 전투 후에 진압되었다.<ref>[[:en:Kevin Tuite|Tuite, Kevin]] (2003), "Political and social significance of highland shrines in post-Soviet Georgia." ''Amirani'' '''9''': pp. 7–23.</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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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
[[파일:Descent into Hell. John the Evangelist. Vani Gospels A-1335, 210v, 12th c.jpg|thumb섬네일|타마르 여왕의 지령으로 복사된 [[바니 복음서]] 원고에 있는 폴리오.]]
그러한 번영은 비잔티움 서부와 이란의 동부 양쪽 모두다 친근하게 느껴지는 [[기독교]]와 세속이 혼합된 조지아의 독특한 문화의 분출을 이루었다.<ref>Suny (1994), pp. 38–39.</ref> 조지아의 군주권은 그리스도교에 의해 강화 되었으며 그 지위는 하느님께서 내리셨다고 여겨졌다. 그 시대에 조지아 정교회 건축은 재설계 되었으며 연속적으로 대규모의 도형 대성당이 건설되었다. 비잔티움에서 전래된 황권에 대한 표현은 비길데 없는 자신의 통치권을 지니는 여성 통치자로의 타마르의 위치를 더욱 강화시키는 다양한 방식으로 개선되었다. 현존하는 다섯 기념 교회의 타마르 여왕을 표현한 초상화들은 명백하게 비잔티움의 심상으로 그려졌을 뿐만아니라, 이란의 이상적인 아름다운 여성상에도 가까운 모습이 조지아의 화법으로 특히 강조되었다.<ref>Eastmond, pp. 94, 108–110.</ref> 중동과 조지아의 친밀한 관계는 조지아어와 [[아랍어]]가 녹아있는 동시대의 전설이 표현된 조지아 주조 화폐에서도 강조되었다. 1200년 경에 주조된 일련의 동전들의 비잔틴식의 [[앞면 뒷면|앞면]]에는 지방마다 상이하게 묘사된 타마르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앞면 뒷면|뒷면]]에는 타마르를 "메시아의 투사"로 찬양한 아랍어 명각이 새겨져 있다.<ref>Rapp (1993), pp. 309–33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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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과 묘소 ==
[[파일:Gelati galleryfull1.jpg|thumb섬네일|left|[[세계문화유산]]인 [[겔라티 수도원]], 타마르 여왕이 묻혔다고 추정되는 곳이다.]]
타마르는 그녀의 남편인 다비트 소슬란보다 오래 살다가 "참혹한 질병"에 걸려 죽기 전에 미리 [[섭정]]으로 그녀의 아들 게오르게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트빌리시]]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서 죽었다. 타마르의 역사가는 여왕이 [[고리 (조지아)|고리]] 도시 근교의 나차르메게비 궁전에서 그녀의 [[와지르|비지에르]]와 왕국의 공무에 대해서 토론하던 중에 갑자기 병으로 쓰러졌다고 전했다. 그녀는 트빌리시로 이송되었고 그리고 나서 아그라니 궁전으로 이송되었고 목숨을 거두었고, 모두들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녀의 시신은 [[므츠헤타]]에 있는 대성당으로 그 다음에는 조지아 왕가의 묘지터가 있는 갈레티 수도원으로 이전되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타마르의 사망 년도가 1213년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렇지만, 소수의 명확치 않은 자료들에서는 그녀가 보다 이른 1207년 또는 1210년에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ref>Javakhishvili (1983), pp. 280, 291–292.</ref><ref>Vateĭshvili (2003), p. 135, fn. 3.</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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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산과 대중 문화 ==
=== 중세 ===
[[파일:Vepkhistkaosani zichy.jpg|thumb섬네일|170px|''쇼타 루트타벨리가 타마르 여왕에게 그의 시를 낭송하고 있다.'' [[헝가리인]] 예술가 [[미할리 지치]]의 그림 (1880년대)]]
여러 세기 동안, 타마르 여왕은 조지아 역사의 [[판테온]]에서 압도적인 양상을 띄었다. 그러나, "황금 시대"였던 그녀의 통치 기간의 그녀에 대한 건축은 그녀의 통치 시대에 이미 시작되었으며 타마르는 그 시대의 중심이 되었다.<ref name="Eastmond 1998, p. 97">Eastmond (1998), p. 97.</ref> 쇼타 루스타벨리를 포함한 중세 조지아의 많은 시인들은 타마르가 그들의 작품들에 영감을 주었다고 했다. 루스타벨리가 여왕에 대한 사랑으로 인생을 허비했으며 그의 마지막 날은 수도원에서 끝마쳤다는 전설이 있다. 루스타벨리의 시에서 연출되는 노련한 왕인 로스테반이 그의 딸 티나틴을 왕위에 앉히게 되는 드라마틱한 장면들은 게오르게 3과 섭정왕 타마르에 비유한 장면이다.<ref>Rayfield (2000), p. 7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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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시대 ===
[[파일:Tamar fresco.jpg|thumb섬네일|left|게오르게 4세(좌측), 타마르(중앙), 게오르게 3세(우측), 성인 전사들(양측)을 묘사한 [[그리고리 가가린|가가린 왕자]]의 베타니아에 있는 왕실 그림의 복원화. (1847년 작)]]
많은 현시대 사람들의 타마르 여왕에 대한 인식은 19세기 [[낭만주의]]와 그 시대 조지아의 지성인들 사이에서 [[국가주의]]의 성장의 영향에 의해 각인된 심상이다. 19세기의 러시아 문학과 서유럽 문학에서, 타마르 여왕의 이미지는 조지아를 인식한 유럽의 [[동양주의|동양 개념]]과 그녀의 지위와 여성으로의 특성을 반영한다.<ref>Eastmond, Antony. "Gender and Orientalism in Georgia in the Age of Queen Tamar", in James (1997), p. 116, n. 39.</ref> [[티롤]] 작가 [[자콥 필립프 팔르메라이예르]]는 타마르를 "캅카스의 [[세미라미스]]"로 묘사했다.<ref>Vasiliev (1935), p. 13.</ref> [[에그조티시즘]]에 매료된 러시아의 시인 [[미하일 레몬토프]]는 낭만주의 시 ''타마라''({{llang|ru|Тамара}}, 1841년)에서 그는 옛 조지아의 전설을 활용하여 여왕 타마르의 이름을 가진 [[세이렌|시렌]]과 흡사한 산악 지방 공주를 시에 표현했다. 레몬토프가 아무런 역사적인 근거도 없이 조지아의 여왕을 치명적인 요부로 묘사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는 타마르의 섹시함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으며 그러한 묘사는 19세기 유럽의 작가들에 의해 더 두드러지게 되었다. [[밀리 말라키레프]]는 레몬토프의 시를 [[교향곡]]으로 편곡했으며 그 음악은 1912년에 [[레온 박스트]]이 무대 미술을 담당해 동양 화법이 아낌없이 구사된 [[발레 루스]]의 공연으로 유럽의 청중들에게 소개 되었다.<ref>Eastmond, Antony. "Gender and Orientalism in Georgia in the Age of Queen Tamar", in James (1997), pp. 103–104.</ref> [[크누트 함순]]의 1903년 작품 ''드론닝 타마라''("여왕 타마라")는 약간의 성공을 거뒀다. 공연 평론자들은 그 극을 "현시대의 여성이 중세 복장의 옷을 입었다."고 했고 "1890년대의 신여성에 대한 시사 해설"이라고 평가했다.<ref>Københavns, Elisabeth Oxfeldt (2005), ''Nordic Orientalism: Paris and the Cosmopolitan Imagination'', p. 220, n. 117. Museum Tusculanum Press, {{ISBN|87-635-0134-1}}.</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