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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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ouis xvi.jpg|thumb섬네일|left|200px|루이 2세]]
프랑스는 18세기에 들어와서 혁명 전야까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년), [[미국 독립 전쟁]](1775~1783년)을 비롯한 여섯 차례의 큰 전쟁에 관련했다. 이런 전쟁은 프랑스에 절대로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루이 14세]](재위 1643~1715년)의 만년에 국가 재정은 위기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 후 위기는 더욱 심각해지고 만성화되어 갔다. 또한 루이 14세에 의한 [[낭트 칙령]]의 폐지(1685년)와 그에 따른 [[위그노]]의 국외 추방은 그 후의 프랑스 산업 발전을 현저하게 저해하는 결과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부르주아의 발전은 영국에 비해서 지지부진했으나, 18세기 후반에는 중농주의자의 주장으로 대표되는 곡물 거래의 자유, 인클로저의 자유를 요구하는 세력이 대두되고 있었다. 공업 부문에 있어서도 면직물 공업이 18세기 초부터 부상하기 시작해서 재래의 모직물{{.cw}}린네르 공업과 경합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길드의 규제는 여전히 강했으나, 자본주의식 매뉴팩처가 각지에 출현하고 있었다. 1774년 재무총감 자리에 앉은 중농주의자인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는 부르주아의 발전을 저지하던 영주와 국가의 통제를 없애버리려 했다. 1776년에는 ‘여섯 가지 칙령’이 공포되었는데, 이것은 농민을 노예 수준의 부담에서 해방시키고, 공업에 있어서의 길드제를 폐지하며, 농업과 노동에 대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부르주아적 이해와 대립하는 봉건적 귀족과 그들에 기생하던 특권 상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불가피한 과제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부르주아적 발전에 대응하여 노동자의 자본에 대한 투쟁이 조직적으로 일어났다. 견직물 공업의 중심지였던 [[리옹]]에서는 직조공들의 파업이 18세기 후반에 연이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한편 귀족 계급은 성직자와 함께 봉건적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18세기에는 여러 그룹으로 갈라져 있었다. 군대에 복무하는 군인 귀족과 법무에 종사하는 법조 귀족이 대표적인 귀족이었지만, 약간의 귀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상류귀족은 궁정(宮廷)에 빌붙어 영지 경영에 관심을 갖지 않고 나태한 생활을 보냈으며, 대부분의 사람은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18세기 후반에는 절대왕권 제도와 절대왕권제의 지지자였던 귀족들 대부분도 재정적 곤란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농민을 더욱 착취하여, 농촌을 거의 황폐화시켰다. 프랑스에서 부르주아가 발전하려면 사회적 대변혁이 불가피했었다. 계몽 사상가는 이와 같은 모순된 사회 제도를 맹비난하면서 합리적인 사회제도의 출현을 선동했다.<ref>{{서적 인용 |제목=[[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장=[[: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절대왕제의 쇠퇴와 프랑스 혁명#절대왕제의 쇠퇴와 프랑스 혁명〔槪說〕|절대왕제의 쇠퇴와 프랑스 혁명〔槪說〕]] |연도= 2004|출판사=도서출판 범한 |인용문=프랑스는 18세기에 들어와서 혁명 전야까지 에스파냐의 계승전쟁을 비롯한 여섯 차례의 큰 전쟁에 관련했다. 이들 전쟁은 결코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루이 14세의 만년에 국가 재정은 위기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 후 위기는 더욱 심각해지고 만성화되어 갔다. 또한 루이 14세에 의한 위그노의 국외 추방은 그 후의 프랑스 산업 발전을 현저하게 저해하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부르주아적 발전은 영국에 비해서 지지부진한 것이었으나, 18세기 후반에는 중농주의자의 주장으로 대표되는 것 같은 곡물 거래의 자유, 인클로저의 자유를 요구하는 세력이 대두되고 있었다. 공업 부문에 있어서도 면직물 공업이 18세기 초부터 대두되기 시작해서 재래의 모직물·린네르 공업과 경합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길드적 규제는 여전히 강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매뉴팩처가 각지에 출현하고 있었다. 1774년 재무총감의 자리에 앉은 중농주의자인 튀르고는 부르주아적 발전을 저지하던 영주적(領主的)·국가적 통제를 제거할 것을 꾀했다. 1776년에는 ‘여섯 가지 칙령(勅令)’이 공포되었는데, 이것은 농민을 농노적(農奴的) 부담에서 해방시키고, 공업에 있어서의 길드제를 폐지하며, 농업·노동에 대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부르주아적 이해와 대립하는 봉건적 귀족과 기생적(寄生的) 특권 상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일이 불가피한 과제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부르주아적 발전에 대응하여 노동자의 자본에 대한 투쟁이 조직적으로 실시되기에 이르렀다. 견직물 공업의 중심지였던 리옹에서는 직포공(織布工)의 스트라이크가 18세기 후반에 속발(續發)되기에 이르고 있다. 한편 귀족 계급은 승려(僧侶)와 함께 봉건적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18세기에는 여러 그룹으로 갈라져 있었다. 군무에 복무하는 대검귀족(帶劍貴族)과 법복귀족(法服貴族)으로 대별되고 있었으나 약간의 귀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상류귀족은 궁정(宮廷)에 기식(寄食)하여 영지 경영에 관심을 갖지 않고 나태한 생활을 보냈으며, 대부분의 사람은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18세기 후반에는 절대왕제와 절대왕제의 지지자였던 귀족의 대부분도 재정적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농민의 착취를 강화시키는 것으로써 더욱더 농촌을 황폐시켰다. 프랑스의 부르주아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대변혁이 불가피했었다. 계몽 사상가는 이와 같은 모순에 찬 사회 제도에 통렬한 비난을 가하여 합리적인 사회제도의 출현을 선동했다. }}</ref> 당시 프랑스는 계몽사상가인 [[장자크 루소|장 자크 루소와]] 백과전서파인 [[볼테르]] 등 [[사회계약설]]이 많은 지식인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것을 국민이 공감하여, 당시의 사회 제도(구체제)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부르봉 왕가]] 정부, 특히 국왕 [[루이 16세]]는 이를 완화하기 위해 점진적인 개혁을 목표로 했지만, 특권 계급과 국민과의 괴리를 채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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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의 전개 ==
=== 삼부회 소집 ===
[[파일:Le Serment du Jeu de paume.jpg|thumb섬네일|250px|테니스 코트의 서약]]
{{본문|삼부회|테니스 코트의 서약}}
[[루이 16세]]는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재정 개혁을 단행하려 하였다. 재무 장관이었던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은 [[명사회]]를 소집해 특권 계층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받을 것을 우려한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개혁안을 거부하고, [[삼부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였다. 1789년의 삼부회가 열리던 당시의 상황은 심각하였다. 1788년의 흉작과 혹독한 겨울로 인한 고통이 전국토를 휘감았다. 정부는 나약했으며 멸시받고 있었다. 관리들은 불복종이 표출되는 것을 진압하기를 두려워하거나 망설이고 있었다. 대의원들에게 주어진 서면 지시 사항은 정치적{{.cw}}사회적{{.cw}}경제적 관심들을 총망라한 것이었으며 아주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소란 가운데, 왕과 그의 신하들은 여전히 수동적인 자세였다. 그들은 삼부회가 개별적으로 열려야 할지 아니면 함께 종합적으로 고민해야 할지 하는 문제도 결정하지 못했다. 1789년 5월 5일 루이 16세는 [[베르사유 궁전]]의 살 데 메뉘 플레지르(Salle des Menus Plaisirs)에서 삼부회를 소집하였고,<ref>{{서적 인용 |저자 = Arthur William Holland |제목 = [[:en:s:1911 Encyclopædia Britannica/French Revolution, The#Opening of the States-General.|1911 Encyclopædia Britannica/The French Revolution]] |연도=1911 |장 = Opening of the States-General.|출판사 = | id= |쪽=|인용문 = The elections to the states-general of 1789 were held in unfavourable circumstances. The failure of the harvest of 1788 and a severe winter had caused widespread distress. The government was weak and despised, and its agents were afraid or unwilling to quell outbreaks of disorder. At the same time the longing for radical reform and the belief that it would be easy were almost universal. The cahiers or written instructions given to the deputies covered well-nigh every subject of political, social or economic interest, and demanded an amazing number of changes. Amid this commotion the king and his ministers remained passive. They did not even determine the question whether the estates should act as separate bodies or deliberate collectively. On the 5th of May the states-general were opened by Louis in the Salle des Menus Plaisirs at Versailles.(1789년의 삼부회가 열리던 당시의 상황은 심각하였다. 1788년의 흉작과 혹독한 겨울로 인한 고통이 전국토를 휘감았다. 정부는 나약했으며 멸시받고 있었다. 관리들은 불복종이 표출되는 것을 진압하기를 두려워하거나 망설이고 있었다. 이와 함께, 근본적인 개혁에 대한 갈망과 그 개혁이 쉬울 것이라는 신념이 일반적이었다. 대의원들에게 주어진 서면 지시 사항은 정치적{{.cw}}사회적{{.cw}}경제적 관심들을 총망라한 것이었으며 아주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소란 가운데, 왕과 그의 신하들은 여전히 수동적인 자세였다. 그들은 삼부회가 개별적으로 열려야 할지 아니면 함께 종합적으로 고민해야 할지 하는 문제도 결정하지 못했다. 1789년 5월 5일 루이16세는 베르사이유 궁전의 살 드 메뉘 플레지르에서 삼부회를 열었다. }}</ref> 귀족 188명, 성직자 247명, 평민 500명이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ref>디트리히 슈바니츠, 《교양-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들녘, 2004년, {{ISBN|89-7527-420-9}}, 219쪽 “…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1788년 삼부회(三部會)를 소집했다. 이것은 1614년이 마지막으로 개최되었던 중세적 의회였다. 거기에서는 귀족, 교회와 일반 시민의 대표가 따로 모였다. ”</ref> 재무총감 [[네케르]]는 재정의 조건을 전제로, 몇 가지 작은 개혁안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표결방식을 둘러싸고 귀족, 성직자 대표와 평민 대표 간에 갈등이 생겼다. 국새상서(國璽尙書)인 샤를 루이 프랑소와 드 폴 드 바렝탕(Charles Louis François de Paule de Barentin)은 그들이 신분별로 또는 인원수대로 투표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알려왔다. 제삼부회(Tiers État)는 회의를 개별적으로 할지 모여서 할지도 결정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실망하였다. 귀족들 중 일부와 하위직 성직자들의 다수는 실질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제삼부회에 동의하였다고 알려졌다. 합동 회의를 개최한다면, 다수를 차지하는 평민 계급은 개혁, 특권의 폐지와 부동산에 대한 중세적 권리의 폐지를 통과시킬 것이었다. 분리 회의를 하는 경우, 귀족의 대부분과 상급 성직자는 개혁을 제한하려고 할 것이었다. 따라서, 삼부회를 합동으로 개최하자는 것이 제삼부회의 첫 번째 의제로 부각하였다.<ref>{{서적 인용 |저자 = Arthur William Holland |제목 = [[:en:s:1911 Encyclopædia Britannica/French Revolution, The#Opening of the States-General.|1911 Encyclopædia Britannica/The French Revolution]] |연도=1911 |장 = Opening of the States-General.|출판사 = | id= |쪽=|인용문 = Barentin, the keeper of the seals, informed them that they were free to determine whether they would vote by orders or vote by head. Necker, as director-general of the finances, set forth the condition of the treasury and proposed some small reforms. The Tiers État (Third Estate) was dissatisfied that the question of joint or separate deliberation should have been left open. It was aware that some of the nobles and many of the inferior clergy agreed with it as to the need for comprehensive reform. Joint deliberation would ensure a majority to the reformers and therefore the abolition of privileges and the extinction of feudal rights of property. Separate deliberation would enable the majority among the nobles and the superior clergy to limit reform. Hence it became the first object of the Tiers État to effect the amalgamation of the three estates.(국새상서(國璽尙書)인 샤를 루이 프랑소와 드 폴 드 바렝탕Charles Louis François de Paule de Barentin)은 그들이 신분별로 또는 인원수대로 투표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알려왔다. 재무총감 네케르는 재정의 조건을 전제로, 몇 가지 작은 개혁안을 제안하였다. 제삼부회(Tiers État)는 회의를 개별적으로 할지 모여서 할지도 결정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실망하였다. 귀족들 중 일부와 하위직 성직자들의 다수는 실질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제삼부회에 동의하였다고 알려졌다. 합동 회의를 개최한다면, 다수를 차지하는 평민 계급은 개혁, 특권의 폐지와 부동산에 대한 중세적 권리의 폐지를 통과시킬 것이었다. 분리 회의를 하는 경우, 귀족의 대부분과 상급 성직자는 개혁을 제한하려고 할 것이었다. 따라서, 삼부회를 합동으로 개최하자는 것이 제삼부회의 첫 번째 의제로 부각하였다. }}</ref> 귀족, 성직자 대표는 신분별 표결 방식을, 평민 대표는 머릿수 표결 방식을 지지함으로써 자신들이 속한 계급에 유리한 방향으로 회의를 이끄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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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스티유 감옥 습격 ===
[[파일:Prise de la Bastille.jpg|250px|thumb섬네일|시민들에게 공격받는 바스티유 감옥, [[장 피에르 루이 로렌트 휴엘]], [[수채화]], 37,8 x 50,5 cm, 1789년 작]]
{{본문|바스티유 습격|프랑스 인권 선언}}
왕당파가 [[제헌국민의회]]의 무력 탄압을 기도하여, 지방으로부터 군대를 결집하고 있다는 것이 전해지자, [[1789년]] [[7월 12일]]부터 군대와의 사이에 충돌을 반복하였다. [[7월 14일]] 아침, [[파리 시|파리]] [[민중]]들은 혁명에 필요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민중들은 도개교(跳開橋)를 내리고 감옥으로 쇄도하여, 감옥을 점령하였다. 이 습격의 성공은 바야흐로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바스티유 습격]]) 이들이 프랑스 대혁명에 가담한 이유는 기득권층들에 대한 감정적인 불만이나 부르주아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자"면서 평등사회를 추구한 [[장 자크 루소]]의 영향으로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사회개혁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혁명의 불길은 지방까지 확산되었다. [[8월 4일]]에 [[제헌국민의회]]는 봉건적 특권이 폐지되었음을 선언하고, [[1789년]] [[8월 26일]]에는 [[프랑스 인권 선언]]을 채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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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렌 사건 ===
[[파일:Duplessi-Bertaux - Arrivee de Louis Seize a Paris.png|thumb섬네일|240px|탈출실패 후 파리로 되돌아온 루이 16세 일가]]
{{본문|바렌 사건}}
혁명 발발로 귀족과 성직자 등 특권 계급의 대부분이 국외로 망명하기 시작하였다. [[1791년]] 국왕과 민중의 중개자인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티 미라보|미라보]]가 죽자, 과격한 혁명을 거부한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한 관계에 있는 [[스웨덴]]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센]]의 도움을 받아,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피신할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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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10일 사건 ===
{{본문|8월 10일 사건}}
[[파일:Jacques Bertaux - Prise du palais des Tuileries - 1793.jpg|thumb섬네일|280px|[[튈르리 궁전]]의 습격, [[카루젤 광장]]에서의 전투]]
프로이센군이 국경을 넘어 프랑스 영토로 침입하자 정부는 조국의 위기를 전국에 호소하고, 이에 따라 프랑스 각지에서 조직된 의용병들이 파리에 집결했다. 이때 [[마르세이유]]의 의용병이 노래한 ‘[[라 마르세예즈]]’는 이후에 프랑스 국가(國歌)가 되었다. 파리 시민과 의용병은 프랑스군이 패배한 원인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적과 내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8월 10일]]에 [[튈르리 궁전]]을 공격하여 왕권을 중지시키고, 내부의 적인 국왕 일가를 모두 [[떵플 탑]]에 유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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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화국의 성립 ==
[[파일:LouisXVIExecutionBig.jpg|thumb섬네일|250px|처형되는 루이 16세]]
편 혁명 전쟁은 [[민족주의]]를 자극시켜 지방에서 의용군이 조직되어 파리로 모이게 하였고, 프랑스군은 마침내 [[9월 20일]]에 프로이센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날 [[입법의회]]가 해산되었다. 그리고 재산이나 소득 금액에 상관없이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는 [[보통 선거]]가 제도화되고, 선거를 통해 새로운 의회인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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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 정치 ===
[[파일:Robespierre.jpg|thumb섬네일|left|200px|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
{{본문|공포정치}}
[[1793년]] 1월 루이 16세의 처형은 유럽 각국에 충격을 주었고, 영국{{.cw}}스페인{{.cw}}사르데냐 왕국도 반혁명에 서게 됐다. 또한 프랑스의 벨기에 합병은 영국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유는 벨기에의 셸데 강 하구의 점령은 영국과 유럽의 무역에 대한 위협요소이기 때문이었다. 영국을 중심으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각국의 군대가 프랑스 국경을 넘었다. 혁명 정부는 “30만명 모병”을 선포하고, 이것에 대한 반발로 왕당파가 부추긴 [[1793년]] 3월 [[방데 반란]]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프랑스 혁명군들 중에서도 탈영자가 늘어만 갔다. 프랑스는 벨기에에서 오스트리아와 벌인 전투도 패했다.<ref>디트리히 슈바니츠, 《교양-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들녘, 2004년, {{ISBN|89-7527-420-9}}, 226쪽 “왕의 처형과 벨기에의 합병은 영국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유는 벨기에의 셸데 강 하구의 점령은 영국과 유럽의 무역에 대한 위협요소이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혁명군들 중에서도 탈영자가 늘어만 갔다. 프랑스는 벨기에에서 오스트리아와 벌인 전투도 패했다. 국민의회는 이런 압력을 받자 그 해결방안을 상업, 재정, 농업 따위의 특수분과 담당위원회들에게 위임했다.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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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재 정부 ===
[[파일:Bonaparte in the 18 brumaire.jpg|250px|thumb섬네일|혁명력 8년 [[브뤼메르 18일]]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본문|총재 정부|통령 정부}}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된 후인 [[1795년]]에 국민공회는 [[공화력 3년 헌법]]을 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총재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는 5명의 총재가 행정권을, 원로원과 500인회에서 입법권을 갖는 체제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총재정부는 출범하자마자 반대파들이 일으킨 반란을 직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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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 정신 ==
[[파일:Eugène Delacroix -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jpg|right|thumb섬네일|250px|《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 1830년작, 325 × 260 cm , [[루브르 박물관]]]]
1789년 혁명 초기부터 혁명의 슬로건은 [[자유]]와 [[평등]], [[박애]]였고<ref name=rev_slogan>Georges Lefebvre (2005) [1947]. 《The Coming of the French Revolution》 Princeton UP. p. 212.</ref>, 이러한 혁명 과정에서 발간된 여러 기록물에서는 세부적인 권리와 당면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에서는 [[자유]]와 [[평등]], [[권리]]로 표현된 경우도 있고, [[1789년]] [[8월 26일]]에 발표한 《[[프랑스 인권선언]]》에는 혁명 슬로건에 부수되는 당면 문제들이 거론되어 있다<ref name=rev_doctrin>Martin, Henri.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French monarchy》 Volume II (1866) p. 481</ref>. 선언문 제2항에서 “자유와 소유권, 안전 그리고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고 밝히어 자유와 소유권, 안전(생존권), 저항권을 천명하였다. 널리 확산된 혁명 정신의 여파로 다양한 계층에서 분출된 수많은 요구들이 혼란의 와중에서 수시로 반영되었고 [[1793년]]에 제정한 '프랑스 헌법'에는 자유와 평등, 안전, 소유권을 말하였고(특히 제8조는 안전과 인격, 권리 그리고 재산이 거론되었다), [[1799년]] [[12월 15일]] 《통령 정부 선언문》에서는 “소유권, 평등 그리고 자유라는 거룩한 권리”로서 나타나고 있다, 그밖에 [[1794년]] 〈방토즈 법령 시행규칙〉에 대한 [[생 쥐스트]]의 기록이나 [[1795년]] 총재 정부 헌법에서도 혁명의 목표들은 다양하게 나타나있다. 혁명 정신과 관련하여“[[박애]]”를 올바르게 명시한 기록은 [[1793년]] [[파리 시]] 집정관 회의이며, 다음과 같은 표어를 모든 집에 내걸도록 하자고 결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