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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기 ===
==== 불우한 청소년기 ====
[[파일:17 age of Yi Gwang-su.jpg|thumb섬네일|right|150픽셀|17세 무렵의 이광수]]
{{참고|천도교|일진회}}
가세가 기울자 [[담배]] 장사를 하던 중, 그의 부모는 이광수가 11세가 되던 해([[1902년]] 8월)에 [[전염병]] [[콜레라]]로 별세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이후의 그의 성장 과정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누이동생 둘과 고아가 되어 외가와 재당숙 할아버지 집을 오가며 자랐다. 그의 집안은 [[조선 태조|태조 이성계]]의 방계 후손이었지만 춘원 스스로 왕족이라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조선 태조|태조]]의 직계 후손도 아니라서 왕족으로서의 예우도 받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성리학]]에 대한 상당한 비판적인 의식을 지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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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산학교 교감 시절 =====
[[파일:Lee Seung Hun.jpg|thumb섬네일|160px|[[오산학교]]의 교장 [[이승훈 (1864년)|이승훈]]]]
{{참고|105인 사건|오산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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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세다 대학 재학 시절 ====
[[파일:Okuma lecture hall Waseda University 2007-01.jpg|thumb섬네일|160px|right|모교 와세다 대학교]]
[[파일:안재홍.jpg|thumb섬네일|120px|left|[[와세다 대학]] 시절의 친구 [[안재홍]]]]
[[1916년]] 9월 [[와세다 대학]] 본과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대학 입학 초 그는 여가시간에 광범위한 독서를 하였다. 한편으로 계몽적 논설을 국내에 보내 《매일신보》에 연재하여 명성을 쌓았고, [[1917년]] [[1월 1일]]부터 [[6월 14일]]까지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 (소설)|무정]]》을 연재했다. 소설 [[무정]](1917)이 [[매일신보]]에 연재된 이후 다음해 [[1918년]] 단행본으로 발간되어 1만부가 팔렸다.<ref>이는 당시로 엄청났다. 당시 [[경성부]]는 1920년대 말에야 25만명의 인구였고, 거의 70~80% 이상이 문맹이었다. 즉 글을 읽을 줄 아는 5~8만 명 가운데 1만 부가 팔렸다는 얘기다.</ref> 연이어 이어서 '소년의 비애', '윤광호', '방황' 등을 탈고하고 《청춘》지에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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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국과 망명 ===
==== 자유 연애론, 무정 발표 ====
[[파일:무정 초판본.JPG|thumb섬네일|160px|right|소설 [[무정 (소설)|무정]] 초판본 ([[1913년]])]]
 
[[1917년]] 3월 [[와세다 대학교]] 철학과에 특대생으로 진급했으나 결핵을 앓아 고생했고, 격심한 과로 끝에 [[결핵]]과 폐질환이 심해졌다. 이때의 친구로는 [[안재홍]],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등이 있었다. 그는 자유 연애론을 주장, 결혼할 자유, 연애할 자유가 있음을 역설했다. 그는 자유로운 연애와 결혼을 할 권리가 있음을 전제하고, 부모의 동의, 허락이 없더라도 연애하고,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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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활동 ====
===== 독립운동 준비 =====
[[파일:日比谷公園.png|thumb섬네일|left|그가 [[2·8 독립 선언]]을 낭독한 [[도쿄]] 히비코 공원]]
{{참고|민족자결주의|신한청년당|2·8 독립 선언}}
[[1918년]] 백혜순과 [[이혼]]하고 4년 연하의 양천 허씨 [[허영숙]](許英肅)과 재혼하였다. 허영숙은 [[일본]] 유학 당시 만나 연애하던 여성이었다. 그러나 [[1918년]] 11월 중순경 [[우드로우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14원칙에 의거한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였다가, 다음달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였다. 출국 직전 그는 [[윤치호]]를 찾아가 대표자 파견을 도와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윤치호]]는 그에게 여비만 주고, 운동 참여를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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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독립 선언 =====
[[파일:신한청년.jpg|left|280px|thumb섬네일|1919년 12월,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기관지인 『[[신한청년]]』의 창간호 표지이다. 주필은 이광수(李光洙)였다.]]
[[파일:단재신채호.jpg|right|200px|thumb섬네일|단재 [[신채호]]]]
{{참고|신한청년당|2·8 독립 선언|3·1 만세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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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하이 임시 정부 활동 =====
[[파일:Daihan Minguok Limshi Zhengfu.jpg|210px|right|thumb섬네일|[[충칭]] 임시정부 청사]]
{{참고|상하이 임시정부|독립신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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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몽 운동과 문필 활동 ====
===== 민족개조론 발표 =====
[[파일:Ahn Changho.jpg|thumb섬네일|left|180px|도산 [[안창호]]. 안창호의 사상에 감화받은 그는 민족개조론과 실력양성론을 주장하였고, 후에는 [[흥사단]]과 [[수양동우회]] 등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파일:민족개조론.JPG|썸네일|300px|right|1922년 5월호, [[개벽 (잡지)|개벽]]에 실린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참고|민족개조론|민족개량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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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되었다. 작가가 기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었던 [[김동인]]은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에게 “비상한 노력 끝에 위선적 탈을 썼다”고, 또 동아일보 기자가 된 주요한에 대해서는 “요한이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파멸을 뜻한다”고 지면을 통해 독설을 퍼부었다.<ref>[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122270425 日帝치하 조선일보는 한국文壇의 산실이었다] 조선일보 2004.12.22</ref> 생계를 위해 기자가 된 일을 두고 [[김동인]] 등은 변절이라 했는데, 그는 작가는 순수하게 소설, 시 등의 작품에만 전념해야 된다는 지론을 펼쳤다. 그러나 [[김동인]]도 1932년에 기자가 된다.
 
[[파일: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JPG|thumb섬네일|right|[[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 시절 ([[1923년]])]]
 
[[1923년]] 중반에는 도산 [[안창호]]를 모델로 한 장편 소설 《선도자 (先導者)》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다가 [[조선총독부]]의 간섭으로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김성수 (1891년)|김성수]] 등이 소환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결국 111회 중편완(中篇完) 부분에서 연재중단되었다. [[1923년]] 가을, 실의에 빠진 그는 [[금강산]]을 순례하면서 [[보광암]]의 주지인 월하노사(月河老師)라는 늙은 [[불교]][[승려]]의 인도로 《법화경 法華經》을 접한다. 이후 그는 《법화경 法華經》을 [[한글]]로 해석하기도 하였으며 [[법화경]]에 널리 심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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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 활동과 브나로드 운동 =====
[[파일:Yi Kwang-su 2.JPG|thumb섬네일|200px|1930년대의 이광수]]
{{참고|문맹퇴치 운동|브나로드 운동}}
[[1930년]]초 [[경성부]] 홍지동에 별장 [[춘원헌]]을 구입하여 별장으로 활용하며 집과 별장을 오갔다. 홍지동의 별장 [[춘원헌]]은 후대에 세워진 [[영인미술관]] 근처에 있으며, [[현진건]]의 집터와 [[박종화]]가 살던 가옥이 주변에 있다. 이곳에 체류하며 [[박종화]] 등을 만나 문학과 시사, 정치에 대한 담론을 하기도 했다. [[박종화]]와의 오랜 대화 틈틈이 얻은 공통된 결론은 교육을 통한 계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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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활동 및 사회 활동 =====
[[파일:이광수 1931.png|thumb섬네일|right|180px|망중한을 달래는 이광수([[1931년]] 무렵)]]
[[1931년]]부터 장편 소설 [[이순신]]을 집필하였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소설인데도 군관에서 말단 수병에 이르기까지 작품 속 등장인물이 모두 실존인물이라는 점이다.<ref name="siss">[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90170362 출판가, 이순신 관련서 봇물] 조선일보 2004.09.01</ref> 그러나 “임진왜란은 당연히 조선과 왜국의 대결이었는데, 이광수가 이를 ’이순신 대 원균 등 이순신을 모함한 장수와 대신들’의 대립구도로 바꾸어 놓았다”는 김탁환 교수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ref name="s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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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양동우회 사건 전후 ====
===== 사회 계몽론 =====
[[파일:Family of Yi Kwang-su.JPG|thumb섬네일|left|180px|이광수 가족사진 ([[1937년]])<br />(왼쪽부터 장남 이진근, 이광수, 차남 이봉근(이광수 앞에 선 이), 부인 [[허영숙]], 삼남 이영근(허영숙이 안은 아기))]]
[[1930년]]대에 이르러 [[자유 연애]] 등이 유행하였다. 이광수는 "일반 민중이 도덕적 이상이 퇴폐해서 인생의 의무라든가 사업이라든가 하는 높은 희구를 버리고 오직 성욕과 호기심만 따르게 되니, 에로란 성욕적 흥미를 만족시키는 관념군이요 그로란 호기벽을 만족시킬 만한 관념군"이라고 해석했다('동광' 1931년 1월 1일자).<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9/03/2012090302503.html '에로·그로·넌센스'의 1930년대] 조선일보 2012.09.04</ref> 에로와 그로의 관념론도 좋지만 큰 뜻을 품는 대의지사가 점차 줄어들어감을 애석해하며 한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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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명월관은 상당히 고급건물이었다. 집도 좋거니와 정원도 밤에 보아 자세히는 알수없어도 상당한 모양이었다. 어린 기생도 4~5인 있었다.” 춘원은 그러나 음식은 그다지 맛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ref name="myungwol1937"/>}}
 
[[파일:Seidaimon Prison2.JPG|thumb섬네일|[[일제 강점기]]의 [[서대문 형무소]]]]
 
그는 종종 [[명월관]]을 찾아 술과 노래를 즐기곤 했다. 황태자 이은 부부와 이광수는 [[도쿄]] [[명월관]]을 자주 이용한 것으로 알려졌다.<ref>[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1032670255 명월관 20년대 日서도 문열어] 조선일보 2001.03.26</ref> 또한 그는 [[커피]]를 즐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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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판과 좌절, 전향 ====
[[파일:Ahn Chang-ho 1937.jpg|thumb섬네일|right|120px|수감 무렵의 [[안창호]]]]
[[파일:DSC 0472.JPG|thumb섬네일|160px|left|서대문 형무소 옥사 내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전국에서 총 181명이 체포돼 이중 42명이 재판에 회부됐고 이광수, 조병옥 등 11명에게 징역이 선고됐다.<ref name="jingghung">[http://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5/12/2008051200544.html 민족운동단체 '흥사단' 창립(1913.5.13)] 조선일보 2003.05.1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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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독부 정책에 협력 문제 ===
[[파일:이광수 이선희 모윤숙 최정희 김동환.jpg|thumb섬네일|right|200px|동료 문인들과 함께 ([[1937년]]<br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광수, [[이선희 (1911년)|이선희]] [[모윤숙]], 최정희, [[김동환]] 순)]]
[[1938년]] [[12월 14일]] 전향자 중심의 좌담회 '시국유지원탁회의'에 참석하여 강연을 한것을 시작으로 적극적인 친일 행위에 나섰다. 이어 이광수는 '민족 감정과 전통의 발전적 해소를 단행하자'고 주장하면서 “의례 준칙의 일본화”와 “생활 방식의 일본화”를 역설했다. 그로 말미암아 이때부터 이광수는 '이광수'(李狂獸)라는 빈축을 사게 되었다.<ref name="실록친일파2" /> 형식적이던 당시 사회의 도덕, 인륜의 구호에 염증을 느끼던 그는 이해관계에 따라 사람을 만나고, 이익이 되지 않으면 떠나버리는 친구, 가족 등의 인간 관계에 대한 환멸감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시중의 비난 역시 속된 위선자들의 비판에 불과하다며 일축,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름뿐이고 실천하지 않는 헛된 도덕과 인륜의 구호만이 난무한다며 현실을 조소하였다. 이후 [[1930년]]대 초에 구입한 홍지동의 별장 [[춘원헌]]에 한동안 칩거해 있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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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씨개명 전후 ====
[[파일:Sōshi-kaimei Lee Kwang Su.jpg|thumb섬네일|left|130px|[[1939년]] [[12월 12일]]자 [[경성일보]]에 실린 춘원 이광수의 창씨 개명 권고 칼럼]]
{{참고|창씨개명|내선일체}}
[[1939년]] [[조선총독부]]에서 창씨개명 시행을 발표하면서 조선인 사회는 논란이 일어났고, 이광수 등은 창씨개명을 공식 지지, 자발적으로 동참할 것<ref name="chang01">[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76966 일제때 산 사람은 다 친일파이고 '척결' 주장에 정치적 고려 있다고? - 오마이뉴스] 2002년 05월 30일자</ref> 을 선언하기도 한다. [[1939년]] [[12월 12일]] 이광수는 [[경성일보]]에 창씨개명에 적극 동참하자는 취지의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ref name="chang01"/> 그의 창씨개명 지지 주장에 무수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창씨개명은 불가피한 일이며 [[일본]]과 [[조선총독부]]는 우리가 원하지 않더라도 강제로 창씨개명하도록 조처할 것<ref name="yun451">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451페이지</ref> 이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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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5월 5일]]부터 이른바 '국민연극'을 표방하는 현대극장 부설 [[국민연극연구소]]에서 예술개론을 강의했다. [[8월 25일]]에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9월 7일]]에는 임전대책협의회가 주관한 채권봉공대 종로대에 참가하여 거리에서 '애국채권'을 팔았다. [[9월 11일]]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10월 18일 조선임전보국단 대구지부 설치를 위한 위원으로 파견되었다. 12월 경성 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시국강연을 했다.
 
[[파일:USSArizona PearlHarbor.jpg|thumb섬네일|left|태평양 전쟁]]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25세면 인생 끝'이라는 노래가 유행하였다. 또한 [[일본]]에는 '자신들이 전쟁터에서 다 죽고 나면 일본 땅에 조선인들이 모두 들어와 살 것'이라는 말도 떠돌았다고 한다. 이때 이광수와 [[최남선]]은 하루 빨리 일본에 협조해 일본의 시민이 되는 게 살 길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1/22/2009112200744.html <nowiki>[</nowiki>최보식이 만난 사람<nowiki>]</nowiki> "획일적인 '친일파' 기준… 역사 해석의 독점권을 가진 당신들은 누구냐?"] 조선일보 2009.11.23</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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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직전 =====
[[파일:Lee Kwang-su 1942.jpg|thumb섬네일|200px|일제 강점기 후반의 이광수]]
[[1944년]] 2월 26일 경성 종로서가 주도한 총후 황민등에서 실무위원을 맡았다. [[1944년]] [[6월 18일]]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이 됨과 동시에 같은 날 열린 결전태세즉용 재선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고, 8월 17일 적국 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라는 제목 아래 문학도 결전이라는 내용의 강연을 했다. 그 뒤 다시 [[양주군]] 진건으로 내려와 요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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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한 생활 와중에 [[윤치호]]의 병문안을 다녔고, 병원에 입원과 통원진료를 반복하던 [[나혜석]]을 찾아 위문하였으며 그 해 12월에 윤치호가 사망하자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한편 윤치호에 대한 투석, 규탄 시위 등을 이광수는 직접 지켜보았고, 병중에 외출을 나선 이광수를 향해 야유를 퍼붓고 돌과 휴지를 던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광수의 가족들에게도 비난과 멸시가 가해졌다.
 
[[파일:이광수 뮤리엘 서재필 주요한.png|thumb섬네일|right|180px|[[1947년]] [[서재필]] 귀국 직후 기념촬영 사진<br />(앞줄 왼쪽 두 번째는 춘원 이광수, 세 번째는 딸 뮤리엘, 가운데는 [[서재필]], 뒷줄 가운데는 [[주요한]](뮤리엘 뒷편에 선 남자)]]
 
1946년 9월 2일 월요일 새벽, 이광수는 6촌 동생이자 승려였던 이학수의 주선으로 봉선사로 숨었고(봉선사 주지였던 이학수는 당시 [[조선불교]] 경기교무원장으로 있었다) 이학수의 도움으로 [[광동중학교]]에서 영어와 국어, 작문 교사로 영어, 국어, 작문을 가르치며 다시 대외활동을 시작한다. 이때 이광수는 [[현제명]]이 작곡한 광동중학교 교가에 가사를 붙였고, [[1976년]] [[5월 29일]] 봉선사와 광동중학교 입구에 이광수 기념비가 세워졌다. [[1947년]] 1월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로부터 안창호의 평전 집필을 의뢰받고 《도산 안창호》(1947. 5)를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이름으로 출간했다(당시 친일에 대한 비판 여론 때문에 그의 이름을 쓸 수 없었으므로 책에 “춘원”의 이름이 사용된 것은 [[1950년]]에 간행된 제3판부터였다). 이때부터 다시 글쓰기에 몰두하여 [[1947년]] 6월 《꿈》을 면학서포에서 간행했고, 그 해 [[김구]]의 자서전인 《[[백범일지]]》가 출간될 때 윤문 작업에 참여하였다<ref>[http://www.kukinews.com/life/article/view.asp?page=1&gCode=all&arcid=0920981005&cp=nv <nowiki>[책과 길]</nowiki> 출간 60년된 백범일지 감춰진 얼굴], 쿠키뉴스, 2008년 7월 25일자 기사.</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