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맹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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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이후 [[임진왜란]] 때 아들 [[고경명]], 손자 [[고인후]]가 전사하고, [[고종후]]는 [[진주성]]에서 전사했다. 그러나 그 뒤로도 그는 죄안에 올라 사면복권되지 못했다. [[1612년]](광해군 4) 손자 고용후(高用厚)가 상소를 올려 그의 아들 고경명의 연고로 고맹영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기를 청하자, 이조와 광해군의 논의 끝에 이로 말미암아 추후에 관작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뒤에는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세자부로 추증되었다.
 
아들 고언명(高彦命)의 서녀는 [[수군절도사]]와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경유]]의 첩이 되었다. [[이경유]]는 [[효령대군]] 이보의 7대손으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지휘관의 한사람인 [[이경록]]의 동생이다.
 
== 관련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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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후]]
* [[신사헌]]
* [[이경유]]
 
==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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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해군일기
* 국조방목
 
{{토막글|한국 사람|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