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홍: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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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3년]](선조 6년) 학문과 덕행을 인정받아 [[황간]][[현감]]으로 발탁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제용감]]정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합천]]에서 의병을 모아 [[합천]], [[성주]], [[대구]] 등지에서 활동하며 왜병을 격퇴하여 영남 의병장의 호를 받았다. [[조식]]의 수제자로서 [[최영경]], [[오건]], [[김우옹]], [[곽재우]] 등과 함께 경상우도의 남명학파의 대표적 인물 중의 한사람이다.
 
왜란이 끝난 후 [[북인]]과 함께 정권을 잡았으며 [[북인]]이 분열한 후에는 [[이산해]]와 함께 [[대북]]의 영수가 되었다. 전란 종결 후 [[대사헌]], [[중추부]]동지사, [[공조]][[참판]] 등을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고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군되었다. 북인이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뉠 때는 적극 간여하지 않았으나 그의 제자인 [[이이첨]] 등이 [[대북]]이었으므로 [[광해군]] 정권의 원로로 예우받았다. 그러나 [[이언적]], [[이황]] 등의 [[문묘]]종사(文廟從祠)를 반대하다가 유생들에게 탄핵받아 [[청금록]](靑衿錄, 儒籍)에서 삭제되는 등의 시비에 휘말리기도 한다. [[1623년]] [[능양군]] 등은 80세 이상의 재상은 처형하지 않는 관례를 어기고 그를 참형에 처했다. 그 뒤 [[서인]]과 [[노론]]으로부터 [[광해군]] 실정의 책임자의 한사람으로 비판을 받아오다가 [[1908년]] [[대한제국 순종|순종]]때 가서야 복권되었다. [[임훈 (1500년)|임훈]], [[조식]]의 문인이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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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홍은 청소년기 무렵 [[거창군|거창]] 안음에 사는 유학자 갈천 임훈(葛川 林薰)의 문하에서 잠시 수학하였다.<ref name="nodae203">노대환,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203페이지</ref>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는 그가 [[임훈 (1500년)|임훈]]의 문하를 나온 배경에 대한 일화가 전한다.<ref name="nodae203"/> 한번은 섣달 그믐날 저녁에 [[임훈]]이임훈이 여러 제자들과 함께 밤을 새우는데 밤중이 되자 모두 잠이 들었으나 정인홍만은 바르게 앉은 채 밤을 새웠다.<ref name="nodae204">노대환,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204페이지</ref> 그의 살갗에는 많은 손톱자국이 나 있고 핏자국이 얼룩덜룩했다. 자신의 살을 꼬집으며 졸음을 쫓았던 것이다.<ref name="nodae204"/>
 
한번은 임훈이 집안의 가장 예쁜 계집종을 뽑아 정인홍이 글 읽는 방으로 보내 유혹했지만 그는 밤새워 태연히 긁만 읽고 계집종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ref name="nodae204"/> 이 두 가지 일을 본 [[임훈]]은임훈은 이는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그를 문하에서 내보냈다고 한다. 초인적인 인내력과 집념을 지녀 임훈이 문하에 두기조차 꺼렸던 정인홍을 거둔 이가 바로 [[합천]]의 남명 [[조식]]이었다.<ref name="nodae204"/>
 
==== 남명의 문하에서 수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