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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정도정(鄭道正), 정응(鄭膺), 정손위(鄭遜位)
|중시조=
|인물 = [[정인지]], [[정초 (조선)|정초]], [[정현조]], [[정숭조]], [[정여창 (1450년)|정여창]], [[정세호 (1486년)|정세호]], [[정운]], [[정대민]], [[정봉수]], [[정충신]], [[정상기]], [[정주영]], [[정인영 (기업인)|정인영]], [[정세영]], [[정상영]], [[정몽구]], [[정몽근]], [[정몽우]], [[정몽헌]], [[정몽준]], [[정몽원]], [[정몽규]], [[정갑주 (법조인)|정갑주]], [[정동채]], [[정명훈]], [[정두언]], [[정미홍]], [[정양석]], [[정용기 (1962년)|정용기]], [[정청래]]
|집성촌 =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br>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br>[[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영동군)|학산면]] [[지내리]] </br>[[평안북도]] [[철산군]] </br> [[황해도]] [[안악군]]
|년도=2015
|인구=174187,204명152명
|순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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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운]](鄭運, 1543년 ~ 1592년) : 임진왜란 때 무신
* [[정봉수]](鄭鳳壽, 1572년 ~ 1645년) : 정묘호란 때 의병장
* [[정충신]](鄭忠信, 1576년 ~ 1636년) : [[전라도]] 나주의 노비였으나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을 따라 종군하다가, 16세의 나이에 왜군의 포위를 뚫고 의주까지 가서 권율의 장계를 선조에게 올렸다. 이러한 의기를 기려 백사 이항복이 그에게 충신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조선 선조]]는 정충신을 노비에서 면천을 시켜주었다. 이후 무과에 급제한 뒤 1621년 만포첨사(滿浦僉使)로 국경을 수비하고, 1623년 안주목사 겸 방어사가 되었다. 1623년(인조 1) 안주목사로 방어사를 겸임하고, 다음해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 이괄의 군사를 황주와 서울 안산(鞍山)에서 무찔러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이괄과 친분이 두터웠던 그가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자신의 결백을 나타내기 위하여 성을 버리고 달아나 문회(文晦) 등의 고발로 체포되었으나 은혜를 입고 풀려났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부원수를 지냈고, 1633년 조정에서 후금(後金)에 대한 세폐의 증가에 반대하여 후금과의 단교를 위하여 사신을 보내게 되자 김시양(金時讓)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와 이듬해 포도대장·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ref>[http://people.aks.ac.kr/front/board/person/viewPersonStatus.aks?bbsCode=55&isEQ 노비에서 최고 무신이 된 정충신]</ref>
* [[정상기]](鄭尙驥, 1678년 ~ 1752년) : 영조 때 지리학자
* [[정만채]](鄭萬采, 1884년 ~ 1961년) : 일제 강점기 군산동산학원 설립자
* [[정주영]](鄭周永, 1915년 ~ 2001년) : 현대그룹 창업자 (아들 [[정몽구]], [[정몽헌]], [[정몽준]] 등)
* [[정동채]](鄭東采, 1950년 ~ ) : 제15·16·17대 국회의원. 제11대 문화관광부 장관.
* [[정명훈]](鄭明勳, 1953년 ~ ) : 지휘자, 아시아필하모니오케스트라 예술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