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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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636년]] [[12월 28일]]([[음력 12월 2일]]) ~ [[1637년]] [[2월 24일]]([[음력 1월 30일]])
|장소 =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결과 = 청 제국의청나라의 승리, [[삼전도의 굴욕]]
|이유 = [[조선]]의 척화배금 외교
|교전국1 = [[파일:Flag of the Qing Dynasty (1889-1912).svg|center|90px]]<center>[[청나라|청 제국]]</center>
|교전국2 = [[파일:Flag of the king of Joseon.svg|center|90px]]<center>[[조선|조선 왕국]]<center>
|지휘관1 = [[숭덕제]]<br>[[아이신아이신기오로 교로 다이샨홍타이지]]<br/>[[아이신 교로 지르갈앙]]<br>[[아이신 교로아이신기오로 도르곤]]<br/>[[아이신아이신기오로 교로 호오거]]<br>[[아이신 교로 요토]]<br>[[아이신 교로 도도다이샨]]<br>[[타타라 잉월다이잉굴다이]]<br>[[슈무루 양구리]]{{KIA}}<br>[[마푸타]]<br>[[사르후다]]<br>[[상가희]]<br>[[경중명]]<br>[[공유덕]]
|지휘관2 = [[파일:Coat of Arms of Joseon Korea.png|17px]] [[조선 인조|인조]]<br>[[김자점]]<br>[[임경업]]<br>[[이완]]<br>[[신경원]]<br>[[김준용]]<br>[[유림]]<br>[[홍명구]]{{KIA}}<br>[[허완]]{{KIA}}
|병력1 = 14만명<br>(좌군단 24,000명<br>청태종 본대 84,000명<br>선봉대 5,000명<br>한인수병 5,000명<br>몽골인 보조군 12,000명)
|병력1 = 1차 선봉대 300명<br>2차 선봉대 1,000명<br>3차 선봉대 3,000명<br>좌익군 12,761명<br>본군 15,272명<br>후미군 12,840명<br>쿠툴어<ref>이훈, 《만주족.이야기》, 너머북스, 2018, ''[[강희]]기에 출반된 [[만주어]][[사전]]《어제청문감(細製淸文鐘, Han i Araha Manju Gisun i Buleku Bithe》은 쿠툴어(Kutule)를 '따르는 노복(Dahame Yabure Ahasi)'라고 설명한다. 청 초기에 조선인도 이와 유사하게 인식하여 《심양일기》에서 구토리(驅土里)를 '종인(從人)'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런 규정에서 알 수 있듯이 쿠둘어는 원래 노복들이 담당했고, 전쟁이 일어나면 팔기의 기병을 수행하어 참전했다. 쿠툴어는 참전하여 말을 관리했을 뿐만 아니라 물을 긷고 밥을 짓는 등 온갖 잡일을 담당하면서 주인을 모셨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약탈할 따도 쿠툴어가 중요했다. 쿠툴어가 많을수록 약탈품도 많이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쿠툴어는 전세가 불리해지거나 전투 병력이 부족할 때는 곧바로 전투병으로 전환해서 쓸 수 있었다.''</ref>2천
|병력2 = 속오군(지역군, 예비군) 80,000~90,000<br>정규군 54,000명<br>수군 30,000명
|사상자1 = 정확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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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역상자 병자호란}}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 [[12월 28일]]([[음력 12월 2일]])부터 [[1637년]] [[2월 24일]]([[음력 1월 30일]])까지 [[조선]]과 [[청 제국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병자란''', '''병란''', '''병자노란(丙子虜亂)''', '''병정노란(丙丁虜亂)''', '''만주의 조선 침공(Manchu invasion of Korea)''', '''청의 조선 침공(Qing invasion of Joseon)'''이라고도 부른다. [[청 제국]]의 [[숭덕제홍타이지]]가 [[명나라|명]]나라를 공격하기 이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였고, [[조선 인조|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청나라|청]]의 포위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왕실이 피난한 [[강화도]]의 함락, [[남한산성]]의 포위를 풀기 위한 근왕병의 작전 실패 등으로 말미암아 항복하였다.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명청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며, [[조선]]으로서는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전쟁 포로로 수십 만의 백성이 [[청나라| 제국]]으로 끌려가 그 사회적 피해가 유례없이 막심하였다.
==양측의 준비상태==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의 사회복구사업, [[이괄의 난]]으로 인한 정예병의 손실등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히 이괄의 난으로 인한 1만 6,000명의 북방군의 손실은 매우 큰 타격이었다.
==전쟁 전 조선==
그당시 4영군을 제외한 정규군은 북방군이 유일했는데, 이괄의 난은 7천 500명의 정예병을 손실시키고 수천의 속오군 병력도 사상시키며 조선군의 전력을 악화시켰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의 사회복구사업, [[이괄의 난]]으로 인한 정예병의 손실 등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히 이괄의 난으로 인한 1만 6,000명의 북방군의 손실은 매우 큰 타격이었다. 당시 4영군을 제외한 정규군은 북방군이 유일했는데, 이괄의 난 때문에 7천 500명의 정예병이 손실되었고, 수천의 속오군 병력도 피해를 입어 조선군의 전력이 약해져 있었다. 하지만 인조의 국방정책으로 인해 조선군은 1만의 훈련도감군, 2만의 충융군, 1만 4천명의 수어군을 확보하게 된다. 7천의 어영군은 전국에 분산되어 속오군에 편제되며, 속오군의 전력을 더 강화시켰다. 전국적으로도 약 9만명이 속오군이 마련되며, 3만명의 수군과 약 600척의 전선을 확보했다.
하지만 인조의 국방정책으로 인해 조선군은 1만의 훈련도감군, 2만의 충융군, 1만 4천명의 수어군도 확보하게 된다. 7천의 어영군은 전국에 분산되어 속오군에 편제되며, 속오군의 전력을 더 강화시킨다. 전국적으로도 약 9만명이 속오군이 마련되며, 3만명의 수군과 약 600척의 전선 확보한다.
 
== 개요 ==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었으나, 강화조약에 따라 [[명나라|명]]과의 관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칭제를 결심하고 조선에 의견을 구하는 사신을 보냈을 때 조정이 사신의 접견조차 거부하고,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이 [[홍타이지]]에게 배례하지 않는 등 친명정책을 변경할 의사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 [[명나라|명]]과의 전면전 전에 조선을 확실히 굴복시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1636년 12월 2일, 12만 군사로 조선을 침략했다. 당시, [[조선]]의 대청 방어전략은 청야견벽(淸野堅壁)으로, 강한 [[청나라|청]]의 기병과 직접 맞부딪치는 것을 피하고 침공로 주변의 성에 군사를 집결하여 공성전을 강요함으로써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명나라|명]]이 아무리 약체화 되었더라도 이를 배후에 두고서는 장기전을 벌이기 어려운 청의 약점을 노린 것으로, 유사시에는 수군이 약한 [[청나라|청]]의 공세를 피할 수 있도록 [[강화도]]에 파천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묘호란]] 당시 [[조선 인조|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하는 것을 지켜본 경험이 있는 [[청나라|청]]은 수성에 들어간 평안도와 황해도의 조선군을 무시하고 [[한양]]과 [[조선 인조|인조]]를 목표로 남하하여 [[조선 인조|인조]]와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하는 길을 차단하였다. 봉화를 통한 긴급 통신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조정이 청군의 침공을 인지한 것은 12월 13일이었으며, [[조선 인조|인조]]는 청군이 한양에 거의 접근한 12월 14일에서야 파천에 나섰으나 강화도로 향하는 길이 이미 차단당한 이후라 [[남한산성]]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