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 도키마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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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각에서 최후까지 ===
겐큐 2년([[1205년]]) 윤7월, 도키마사는 후처 마키노 카타와 공모해
마키씨(牧氏)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 대해서 [[난보쿠초 시대|남북조 시대]]의 역사책인 《보력간기(保暦間記)》는 도키마사와 마키씨 집안에 의한 사네토모 살해는 거의 성공 직전에 있었다고 했고, 가마쿠라 초기의 《육대승사기(六代勝事記)》는 도키마사가 음모의 최종 결행을 기획했다고 했으며 《호조구대기(北条九代記)》는 모두 도키마사의 계획이었다고 했다<ref>『北条義時』吉川弘文館。120頁。</ref>. 또한 《아즈마카가미》는 도키마사가 나이를 먹어 판단력이 흐려진 나머지 마키씨의 주도에 놀아나서 음모를 꾀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ref>『北条義時』吉川弘文館。121頁。</ref>. 한편으로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살해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아들 요시토키와의 대립이 깊어졌고<ref>요시토키는 시게타다와는 의형제였다. 시게타다가 죽고 그의 무죄가 밝혀지자 요시토키는 아버지에 대한 보복으로 아버지를 지지하던 이나게 시게나리(稲毛重成)와 한가야 시게토모(榛谷重朝) 등을 잡아 죽이기도 했다. 『北条義時』吉川弘文館。117頁。</ref>、또한 도키마사가 시게타다를 살해한 것에 대해 시게타카에 대한 동정이 모이면서 도키마사는 덕망을 잃게 되고 도키마사에 대한 요시토키의 경계심이 강해졌으며<ref>『北条義時』吉川弘文館。117頁。</ref> 이는 도키마사와 마사코·요시토키 남매의 정치적 대립의 배경이 되었다고 여겨진다<ref>『北条義時』吉川弘文館。122頁。</ref>. 이후 도키마사는 정치무대에 서지 못하고 정치생명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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