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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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강력한 내정 개혁 실시로 그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지자 측근 인사들은 그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유하였고, 이에 나폴레옹은 그것을 국민 투표로 결정하도록 하였다. 1804년 7월의 국민투표에서 찬성표 3,572,329와 반대표 2,569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제정을 수락하였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1804년]] [[12월 2일]]에 마침내 즉위식을 거행하여 [[프랑스 제국]]의 초대 황제인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프랑스가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으로 전환된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야심만만했던 나폴레옹은 역대 프랑스 왕들이 전통적으로 대관식을 치른 랭스 대성당을 단호히 거부하고 [[노트르담 대성당]]을 즉위식 장소로 선택하였다. 자신은 부패한 [[부르봉 왕조]]를 계승하는 군주가 아닌, 위대한 [[로마 제국]]의 대를 이은 후손임을 만천하에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나폴레옹은 [[기독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의미에서 자신이 직접 황제관을 썼으므로 교황 [[비오 7세]]는 축복기도를 하고 그를 포옹해주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파일:Andrea Appiani 002.jpg|오른쪽|섬네일|180px|이탈리아 국왕으로 즉위한 나폴레옹]]
나폴레옹의 황제 등극은 다방면으로 여러 가지 충격을 주었다. 그를 공화제와 인민들의 영웅이라고 생각해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으로 나폴레옹에게 헌정할 예정이었던 교향곡 제3번을 작곡하고 있던 [[베토벤]]은 그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하여 악보에서 펜을 던지고 한탄하며, 나폴레옹에게 곡을 헌정하는 것을 그만두고 제목도 《영웅》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이후 베토벤이 "나는 처음에 나폴레옹을 나쁘게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네"라고 말한 것은 잘 알려져있지 아노다않다. 또한 [[남아메리카]] 독립운동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시몬 볼리바르]]는 나폴레옹의 황제등극을 보면서 절대권력에 혐오감을 갖게 되어, 후에 왕정국가 건설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던 산 마르틴과 결별하였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스페인령 리오 데 라플라타는 독립하게 되는데 그 독립국이 훗날 [[아르헨티나]]였다.
 
일단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고 나서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세계 제일의 수도로 만들기 위해 도시에 대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가구의 새로운 계산법(짝수법, 홀수법)을 마련하고, 분수를 설치하고 묘지를 정리하였으며, 광장과 회관, 시장, 강변 구역과 제방 및 공공 시설과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정비하였다. 또 높은 지위의 사람들과 위인들의 동상이 거리 곳곳에 세워지고, 교량이 건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