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치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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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통신사}}
'''홍치중''' (洪致中, [[1667년]] ~ [[1732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남양 홍씨|남양]](南陽), 호는 북곡(北谷), 자는 사능(士能), 시호는 충간(忠簡).
 
[[1712년]] [[북평사]]로서 [[백두산정계비]] 설립에 기여하였고, [[1719년]] [[조선통신사]] 정사로서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쇼군]] 취임을 축하하기위해 [[일본]]에 다녀오고나서 [[부제학]], [[이조참판]], [[공조참판]], [[도승지]], [[대사성]], [[대사헌]]을 거쳐서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하지만 [[조선 경종|경종]] 시대에 [[소론]]의 배척으로 [[홍주군|홍주]][[목사 (관직)|목사]]로 좌천되었다. 영조 때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이후 영중추부사로 전직하였다.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조선의 공신|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 가족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