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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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설 ==
[[1866년]] 고종 3년에 있었던 두 번에 걸친 통상 요구가 거절되자 오페르트는 [[1868년]] 고종 5년에 차이나號(호)를 빌려서 [[충청도]] [[아산만]]에 내항해 [[덕산군]]에 상륙해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했다. 급보를 받고 충청 감사가 군병을 급히 파견했을 때는 오페르트 일행이 돌아가고 난 뒤였다. 오페르트 일행은 다시 북항(北航)해 인천 [[영종도]](永宗島) 앞바다에 들어와 개국 통상을 교섭코자 관리 파견을 요청했으나 조선 수비병과 충돌해 아무 성과도 없이 [[상하이]]로 돌아갔다.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은 후일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된다.
 
== 사진 ==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은 후일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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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omb of Prince Namyeongun 01.jpg|thumb|남연군의 묘
파일:Tomb of Prince Namyeongun 02.jpg|thumb|남연군의 묘 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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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