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신문협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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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문협회 사무국 수정.(2018.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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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혁 ==
 
 
<신문협회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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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1957년 6월 국내 일간신문의 발행인들은 ‘한국일간신문발행인협회’를 설립했다. ‘한국신문협회’의 전신이었다.
 
 
<1950년대 좌우대립과 경영난 타개>
 
1950년대 전후 복구가 진행되면서 정보에 대한 갈증이 커졌다. 자유당 정권의 부패를 척결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열망도 높았던 시기였다. 1957년 6월 신문협회 창립 당시 전국의 일간 신문사는 이미 43개사였다. 협회 출범 후 가장 먼저 이뤄낸 일은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한국통신협회’ 등 언론 제 단체와 함께 ‘신문윤리위원회’를 창설한 것이었다. 신문협회는 이밖에 언론인의 자질 향상, 언론종사자 처우 개선, 사이비 기자 근절대책 등의 사업을 벌였다.
 
 
<1960년대 민주당 정권-군사정권-제3공화국 시기>
 
1960년대는 ‘군사정권의 언론 통제’로 기록되는 시기다. 5·16 쿠데타 일주일 후 발표된 언론통폐합으로 전국 일간지의 65%가 없어졌다. 1966년 기술의 진보와 함께 컬러신문이 첫선을 보였다. 신문협회는 1966년 편집, 업무, 공무, 관리 등 4개 부문의 ‘한국신문상’을 제정했다.
 
 
<1970년대 유신치하의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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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취리히에서 열린 국제신문발행인협회(FIEJ) 총회에서 신문협회가 만장일치로 회원에 가입되었다. 선진 해외 언론계와의 교류는 한국 언론의 발전을 도모하고, 한국 언론의 실태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1980년대 언론통폐합과 언론기본법 제정>
 
80년대 신군부는 언론 통폐합과 집단 해직의 칼을 또 빼들었다. 언론기본법과 보도지침이 국민의 입과 귀를 틀어막았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유신시대의 종말을 재촉했으며, 1987년 6월 드디어 민주화가 성취됐다. 신문협회는 1985년 ‘신문협회보’를 타블로이드 8면으로 창간하고, 신문협회 주최로 국제신문발행인협회(FIEJ) 이사회를 서울에서 개최했다. 이 해에는 신문활용교육(NIE)을 활성화하기 위해 해외 각국 사례를 국내에 최초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1989년 4월 7일 서대문 현저공원에 서재필 박사 동상 제막식을 갖고, 8월 31일에는 서재필 선생의 잔여 유품 346점을 미국에서 인수하였다.
 
 
<1990년대~2000년대 자율경쟁과 기자실 폐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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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신문협회는 세계의 1천 500여 언론인이 참석한 가운데 ‘제58차 세계신문협회 서울총회’를 주최했다. 협회는 언론 제 단체와 함께 2014년 ‘재난보도준칙’을, 2016년 ‘선거여론조사보도준칙’을 제정했다.
 
 
<지금 펼치고 있는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