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녕 (1827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1827년]](순조 27) [[9월 16일]]에 출생했다. 본래는 이병상과 청주한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 청주한씨는 한범배(韓汎拜)의 딸이다. 생가 계모는 안동김씨로 김이백(金履栢)의 딸이다. 족숙 이병로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한편 그의 생가에는 다시 병희의 아들 이이녕(李以寧)이 입양되었다.
 
양아버지 이병로는 [[이광정]]의 11대손이고, 양어머니는 안동권씨로 권용전(權用銓)의 딸이다. 그는 조헌묵(趙憲默)의 딸 순창조씨와 결혼했으나 자녀가 없고, 뒤에 연안차씨와 재혼했지만 역시 자녀가 없어 나중에 이의국(李義國)을 양자로 입양하였다재혼하였다.
 
[[1874년]](고종 11년) [[7월 24일]] [[선릉]][[참봉]](宣陵參奉)이 되고, [[1876년]](고종 13) [[12월 20일]] [[내자시]][[봉사]], 이듬해 12월 5일 부인상으로 사퇴하였다. [[1880년]](고종뒤에 14)연안차씨와 [[빙고]][[별검]]이재혼하였으나 되고,역시 [[4월자녀가 26일]]없어 나중에 이의국(李義國)을 [[세자익위사]]좌부솔이양자로 되었다입양하였다.
 
[[1880년]](고종 14) [[빙고]][[별검]]이 되고, [[4월 26일]] [[세자익위사]]좌부솔이 되었다.
 
[[1881년]](고종 18) [[11월 5일]] [[사헌부]]감찰, [[1882년]] [[3월 16일]] [[세자익위사]]우위솔, 그해 [[11월 1일]] 좌위솔이 되었다. [[1883년]](고종 20) [[6월 25일]] [[경모궁]]령(景慕宮令)을 거쳐 그해 [[의흥]][[현감]]으로 나갔다. [[1884년]] [[6월 15일]] 폐책활리로 읍의 정사가 날이 갈수록 엉망이라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그해 [[12월 29일]] 사면받았다. 이후 [[문의현]]으로 낙향했다가 [[1886년]](고종 23) [[10월 7일]] [[의금부]]의 나래 상주로 [[한성]]으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투옥 대기 상태에서 10월 23일 고종이 행하지 말라 하여 풀려났다. [[1890년]](고종 27) [[1월 5일]] [[기기국]]에서 그를 신임 [[기기국]]위원에 추천, [[1월 9일]]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