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리 에이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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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무시하던 대본영에서 정보 분석과정으로 미군의 침공패턴을 정확히 읽어 "[[더글러스 맥아더|맥아더]]의 참모"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쟁 동안 [[야마시타 도모유키]] 육군대장의 참모로 전후엔 해외 전쟁사 연구가로서 능력을 높게 평가받았다.
[[의회 의원|참의원]]이자 [[일본의 국토교통대신]]이었던 [[마에다
== 전쟁중 ==
[[나라현]] [[
43년 육사전술교관으로 근무하다가 [[대본영]] 육군부 제2참모로 대본영에서 근무한다. 독일과와 소련과를 거쳐 미국과로 이동하게 되는데 독일과 소련처럼 스타일이 다른 곳들을 거친 것은 이후 호리의 분석에 도움이 되었다. 미국군의 패턴을 연구해 이후 미군의 상륙패턴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44년에는 『적군전법 빨리알기(敵軍戦法早わかり)』라는 책자를 써서 미군으로 무모한 돌격을 하거나 총검술따위로 자멸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을 전파했는데 이 내용을 처음 채택한 사단은 [[펠렐리우 전투]]로 유명한 나카가와(中川州男)였다. 이전까지는 중국과의 전투경험만을 기초로 해서 미군과 싸워왔기 때문에 사기가 낮은 상태에서 무모한 돌격만을 감행해 일본군의 손실만 커져가던 상황이었다. 이후 [[이오 섬 전투]] 과 [[오키나와 전투]] 등의 미군과의 전투에서 미군의 손실이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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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본영의 작전참모였던 [[세지마 류조]]에게 묵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진상은 알 수 없지만 이 전보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호리는 마닐라로 이동하면서 타이페이공항 위를 지날때 비행장 시설의 피해등을 살펴보고 이것은 상륙전 주변지역의 항공기지를 먼저 공격하는 전형적인 미군의 공격패턴을 확인한다. 당시 미군은 [[레이테 섬]] 상륙을 목적으로 3단계 공습계획을 짜고있던 상황이었다.
호리는 마닐라에 도착한 뒤 남방 총군사령부2과에서 대만해협항공전의 전과 재검토를 다시 언급하며 미군은 건재하고 항공모함도 12척이 있다고 계산한다. 제14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 대장, 참모 부장 니시무라
헌병대가 격추당한 미군 함재기의 파일럿을 신문한 결과, 루손 섬을 공습 중인 미군 정규 항공모함이 12척이고 그 함명이 모두 판명하가능하다고 알려졌다. 대본영 해군부의 발표로 대만해협 전과는 모두 오류였으며 호리가 보고한 것이 옳았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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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후 ==
1954년 육상 자위대에 입대. [[요시다 시게루]] 수상의 군사 브레인으로 자위대 창설의 주역이던
60년 겨울 서독의 칼스루에의 전차공장을 주재무관단의 일원으로 시찰했다. 그래서 일본내 전차제작 기술자들이 호리를 방문해 "일본 방위청에서는 독일 전차를 참고해 일본의 신전차를 만들고 싶지만 정작 독일 전차를 볼 기회가 없습니다. 독일 전차의 특정 부분 치수를 정확히 재어 주면 나머지는 대략 알 수 있으니 좀 부탁합니다."라고 부탁했다. 호리는 자신의 손가락과 소지가 허락된 지우개달린 연필을 이용해 견학하면서 부탁받은 부분의 치수를 정확히 쟀다. 대사관에서 기다리던 그 기사들은 호리의 정보를 받고 매우 고마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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