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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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1928년]]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슬로바키아]](당시는 [[체코]]) 이민 가정으로 위로 두 형이 있었고, 부모님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그 자신도 평생 교회를 다녔다. 본래 그의 집안 성씨는 '''바르홀라'''(Varchola)였으나, 영어식인 워홀로 바꾸었다. 육체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1942년]] 앤디가 14세 때 사망하였고, 그 후 어머니 줄리아가 혼자 아들들을 키운다. 앤디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역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카네기 공과 대학(현재 [[카네기멜론 대학교]])에서 상업 예술을 전공한다. [[1949년]] 졸업을 하면서 [[뉴욕 시]]로 이주하여 잡지 삽화와 광고 제작으로 명성을
== 20~30대 ==
[[파일:Campbells.jpg|섬네일|230px|캠벨 수프 캔]]
[[1950년]] (22세) 대학 졸업 후 [[뉴욕]]으로 옮겨 '보그'(''VOGUE'')나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 등의 잡지 광고와 일러스트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2년]]에는 신문광고 미술 부문에서 "아트 디렉터스 클럽 어워드"(''Art Director's Club Award
''앤디 워홀은 [[실크 스크린]](silk screen)을 작업에 사용했다. 워홀이 신발 산업에서 일할 때 잉크를 종이에 묻혀서 인쇄하는 블라티드 라인(blotted line)이라는 초보적인 수준의 인쇄 기술을 개발했다.''
''[[1960년]]'' ''(32세), 그는 일러스트레이션의 세계를 버리고 미술의 세계로 옮겨간다. '[[배트맨]]’, '[[딕 트레이시|딕 트래이시]]’, '[[슈퍼맨]]’ 등 만화를 모티브로 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지만, 계약했던 〈레오 캐스테리 갤러리〉에서 뿐만 아니라 미국 만화를 모티브로 한 시대를 풍미한 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팝 일러스트레이션 작품을 접한 이후 이 주제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당시 미국은 눈부신 경제 발전을 추구하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그는 〈캠벨 수프 캔〉이나 〈[[코카콜라]] 병〉 등 유명한 상품들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후에 그는 실크스크린으로 바꾸어, 대량생산된 상품의 그림을 그리는 것만 아니라 작품 자체를 대량생산하였다. 그는 "예술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뉴욕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인 《[[팩토리 (스튜디오)|팩토리]]》(The Factory)에서 판화, 신발, 영화, 책 등을 만들어내었다. 워홀의 작품에는 의뢰를 받아 제작한 초상화나 광고도 포함되어 있다.''
''[[1961년]]'' ''(33세),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캠벨 수프 캔〉이나 [[지폐]]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그린다. [[1962년]]에는 [[실크 스크린]]'' 프린트를 이용하여 작품을 양산하게 된다. 주제에도 대중적으로 화제가 풍부한 것을 선택했다. [[메릴린 먼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는 곧바로 영화 《[[나이아가라]]》의 먼로의 최고의 스틸 사진 초상화를 잘라서 다른 색깔을 입혀서 대량 생산을 계속했다. 제트기 사고, 자동차 사고, 재해 등의 화재의 신문 보도 사진을 사용했다.
=== 팩토리에서 제작 활동:30대후반~40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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