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하르트 리히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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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출생한 리히터는 일찍이 15세 때부터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1951~54년 사이 사회주의 동독의 드레스덴 미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면서 보수적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익혔다. 파리여행, 카셀 도큐멘타 참관 등을 통해 서방의 현대미술 흐름에 눈을 뜨게 된 그는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를 전후해서 부인과 함께 뒤셀도르프로 이주했다. 1961년부터 1964년까지 뒤셀도르프의 미술아카데미에서 칼 오토 괴츠Karl Otto Götz 밑에서 수학하면서 시그마 폴케Sigmar Polke, 콘라드 피셔-루에크Konrad Fisher-Lueg,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 등과 교우한다. 이때 플럭서스Fluxus 운동 및 팝아트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시그마 폴케, 콘라드 루에크와 함께 이른바 자본주의 리얼리스트 그룹에서 활동했다.<ref name=>국립현대미술관, 게르하르트 리히터, 컬쳐 북스, 2006, 표지 뒷페이지</ref>
 
그는 오브제 미술, 행위 미술 등 현대 실험미술의 열풍 속에서도 전통장르로서의 회화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고정돈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현대적 감각과 방법으로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기존의 관념적, 주관적 의도에 의해 속박되지 않는 회화의 새로운 길을 찾고자 했다. 즉 대상의 묘사로서의 회화를 거부하고 회화를 통해 순수한 실재세계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ref name=>국립현대미술관, 게르하르트 리히터, 컬쳐 북스, 2006, 표지 뒷페이지</ref>
 
그는 1962년 이후 사진에 기반한 회화를 제작한다. 사진이미지는 인공적 가필을 통해 그대로 회화로 재생산되었다. 심지어 추상회화를 위해서도 사진이미지는 활용된다. 작가에 있어 사진은 “양식도, 구성도, 규범도 없으며… 개인적 경험을 떨쳐버리게 해주는 순수한 이미지”로서 기존의 예술개념을 탈각한 회화를 만드는 방법을 의미했으며, 객관적 실체를 기계적으로 드러내는 사진을 통해 개인적 경험과 관념에 물들지 않는 이미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ref name=>국립현대미술관, 게르하르트 리히터, 컬쳐 북스, 2006, 표지 뒷페이지</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