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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업회'''(勸業會)는 연해주에 설립된 대한민국의 항일독립운동 단체이다. 경술국치 이후 [[1911년]] 연해주에서 설립되어, 초기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군사활동을 하는 [[대한광복군 정부]]로 발전하였다.
 
== 설립 배경 ==
당시 연해주에는 [[1864년]] 이래 권업회 창립 전후까지 20만명 가량의 한인이 이주하여 한인사회를 형성하였다. 이들의 부류를 보면,
* 첫째, 러일전쟁 이전에 이주하여 경제적 토대를 이루고, 러시아에 귀화하여 정치·경제적 지위와 신분을 획득한, [[최재형]]을 비롯하여 [[최봉준]](崔鳳俊)·[[김학만]](金學萬)·[[김도녀]](金道汝)·[[차석보]](車錫甫)·[[김익용]](金翼鎔)·[[김병학]](金秉學) 등이다. 이들은 한인의 이주와 개척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 한인사회의 지도급 인물로 부상하여 한인의 경제적·사회적 지위 향상에 기여해 왔다. 그 결과 각 지방 한민회의 풍헌(風憲)·풍속(風俗)·도헌(都憲) 등의 직임을 맡아 한인사회의 자치제 확립에 기여하였다.
 
* 둘째, 국내 및 간도에서 일제와 항전하다 북상한 [[이범윤]]·[[홍범도]]·[[유인석 (의병장)|유인석]] 등 의병 계열이다. 이들은 [[1908년]]을 전후 최재형 등과 연합하여 의병단(義兵團)을 정비, [[1910년]] 5월 [[13도의군]]을 편성하여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하였다.
 
* 세째, 국내 등의 지역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하다가 군대 해산 전후로 망명하여, 연해주를 독립운동기지로 삼은 계열이다. 헤이그특사로 갔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국민회 결성에 참여하고, 북미지방 총회장인 [[정재관]](鄭在寬)과 함께 연해주에 온 [[이상설]]을 비롯하여 [[신민회]] 등에서 활동하던 [[이종호]]·[[신채호]]·[[이동휘]]·[[김하구]](金河球)·[[윤해]] 등이다. 이들은 급진적 의병항전보다는 민족의 실력 양성을 바탕으로 ‘독립전쟁론’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이들은 연해주에 미주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시베리아지방 총회와 그 지회(支會) 등을 결성하였다.
 
== 개요 ==
최재형을 비롯하여 연해주에서 한인의 이주 개척과 자치,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해 온 인물들이 [[13도의군]]과 [[성명회]]를 조직하였다가 핵심들이 일제의 외교공세로 곧 러시아 당국에 체포, 투옥되었지만, [[1911년]] 들어 감옥에서 풀려나 블라디보스톡에 재집결하였다.
 
[[1911년]] 5월 20일 [[이종호]](李鍾浩), [[엄인섭]](嚴仁燮), 최재형, 홍범도, [[김익용]](金翼鎔), [[강택희]](姜宅熙), 등이 주축이 되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조직한 [[국권피탈]] 이후 초기의 최대 한민족 항일독립운동단체이다. 겉으로 명칭만 보면 순수한 경제활동을 위한 단체인 것처럼 보이나 이것은 일제와 러시아의 탄압과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위장으로 붙인 것이고 실제로는 항일구국운동을 목적으로 하였다.
 
== 조직 ==
창립 당시 본부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두었으며, 연해주 주요 지역에 지회와 분사무소를 두었다. 회장에 [[최재형]](崔才亨), 부회장에 [[홍범도]](洪範圖)를 선임하였다. 각 지방으로 회원권유위원(會員勸誘委員)이 파견되어 회세(會勢) 급속 확장하였다. 권업회는 대외 활동의 편의를 위하여 러시아 극동총독(極東總督) 곤닷지의 허가를 얻었다. 그 해 12월 17일 다시 총회를 개최하여 회칙을 개정하고, 조직을 의사부와 집행부로 나누어 의사부의 의장과 부의장이 회를 대표하기로 하였다.
 
* 의장에 [[이상설]](李相卨), 부의장에 [[이종호]]가 선임.
 
* 권업회의 회원수는 [[1913년]] 10월 2,600명, [[1914년]] 8,579명.
 
== 활동 ==
권업회의 근본 목표는 광복군(光復軍) 양성에 있었다. 광복군 양성의 기반이 되는 교육의 진흥과 농,공,상 등 실업의 권장을 주창하였고, 군대의 양성은 가능한 한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 《권업신문》을 창간하여 민족정신을 고양하고, 교민을 단결시키며, 한민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 한인의 교육진흥 사업으로 블라디보스톡 한인촌에 있던 한인학교인 계동학교(啓東學校)를 대규모의 한민학교(韓民學校)로 확대하여 한인들의 민족주의 교육의 중추로 삼았다.
 
=== 군사활동 ===
* 권업회는 광복군 간부의 양성을 위해 [[1913년]]부터 동북만 수분대전자의 나자구에 독립운동사 상 최초의 사관학교인 [[대전학교]](大甸學校)를 설립, 운영하였다. 졸업생이 상당수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 광복군의 군영지(軍營地) 확보를 위해 러시아의 극동총독과 교섭을 벌여 적지의 조차(租借)를 추진하였다. 라브류와 밀산부 북쪽에 있는 항카호 주변의 이류가(伊柳街) 및 흑룡강(黑龍江)과 송화강이 합류하는 강구(江口)인 올라까하라는 곳의 토지를 조차하였다. 겉으로는 한인의 집단 이주를 추진하는 것 같이 하였지만 군영지 마련과 광복군의 훈련을 위한 것이었다.
 
* 양군호(養軍號)와 해도호(海島號) 등으로 불리는 광복군 양성을 위한 비밀결사를 운영하였다. 양군호와 해도호는 겉으로 잡화상점에 불과하나 실제로는 광복군 양성을 위한 비밀활동을 전개하였다.
 
* 홍범도가 회장으로 있던 [[노동회]](勞動會)도 한인 노동자에게 일터를 마련하여 생활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수입 중 일부를 저축하여 광복군을 양성하는 데 쓰였던 결사로 본다.
 
이상설을 비롯한 이동휘·이동녕·이종호·정재관 등이 주가 되어 중국과 러시아에서 독립운동 세력들을 규합, '연해주 이민 50주년'에 맞추어 [[1914년]] 블라디보스톡에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건립하였다. 이상설과 이동휘를 각기 정·부통령으로 선출, 국내의 모든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광복군정부는 그 해 9월에 그 모체인 권업회와 함께 러시아의 전시체제 확립에 따라 탄압을 받아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 해체 ==
권업회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러일전쟁에 패한 러시아 정부는 권업회가 정치적 목적을 띄고 있음을 간파하고, 한인들의 정치·사회활동을 탄압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 해 8월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러시아 주재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영사관에서는 러시아 당국에 권업회와 권업신문 등의 폐지와 이종호, 이동녕(李東寧), 김하구, 오주혁(吳周赫), 이갑, 안공근(安恭根) 등 블라디보스토크, 연추, 니콜스크-우수리스크 등지에서 활동하는 한인 운동자들의 추방을 요청하였다.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의 동맹국이 된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1914년]] [[8월 7일]] 권업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기관지인『권업신문(勸業新聞)』도 정간되었다. 그러나 권업회의 전통은 [[1917년]] [[전로한족중앙회]](全露韓族中央會)의 창설로 이어졌다. 연해주 지역 한인들의 이러한 활동을 통한 유대와 항일독립투쟁 의지는 [[1919년]] [[대한국민의회]] 성립의 토대가 된다.
 
== 함께보기 ==
* [[동의회]]
* [[최재형]]
* [[홍범도]]
* [[이상설]]
* [[이종호]]
* [[대한광복군정부]]
* [[대한국민의회]]
 
== 외부 링크 ==
{{토막글|단체}}
 
[[분류:권업회| ]]
[[분류:한국의 독립운동]]
[[분류:1911년 설립]]
[[분류:1914년 해체폐지]]
[[분류:한국의 독립운동단체]]
[[분류:권업회]]
[[분류:자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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