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제국 지배 하의 조지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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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 설명|러시아에서는 [[조지아 (국가)|조지아]]를 [[그루지야]]라고 불렀다.}}
{{조지아의 역사}}
[[파일:Karte_des_Kaukasischen_Isthmus_-_Entworfen_und_gezeichnet_von_J-Grassl_-_1856.jpg|thumb섬네일|200px|''독일에서 제작한 ''캅카스 지협의 지도'', 1851년 J. Grassl.]]
 
1801년에서 1918년 사이에 [[조지아 (국가)|조지아]]는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다. 수 세기동안, 남부 [[캅카스]]에서의 [[무슬림]] [[오스만 제국|오스만]]과 [[이란|페르시아]] 제국사이의 전쟁으로 조지아의 전역은 여러개의 주로 분열되었다. 18세기 경에, 세 번째 제국의 권력, 러시아가, 그 지역에 출현하게 되었다. 러시아가 조지아와 같은 [[기독교]] 국가가 된 다음부터는, 조지아는 점점 더 러시아의 도움을 갈구했다. 1783년에는 선두의 조지아 왕국이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지만, 1801년에 그 나라는 러시아에게, 현([[구베르니야]], 또는 조지아 통치 기관)의 지위를 받아, 완전하게 합병되었다. 이후의 117년 동안, 조지아는 [[러시아 제국]]의 일부가 되어야 했다. 러지아의 통치는 조지아에게 평화를 제공했으며 공격으로 부터 보호해주었으나, 조지아는 그러한 점을 자주 지나치게 이용하였으며 지역 감정에 무신경했다. 19세기 후반에 러시아의 권위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는 국민 운동을 일으키게 했다. 러시아 제국 시대는 유럽의 지적인 경향만큼 조지아에게 비길데 없는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변화를 가져다 줬다. 새로운 사회적 계층이 나타났다. [[농노]]의 해방은 많은 소작농들을 자유롭게 했지만 그들의 가난은 약간만 완화되었다. [[자본주의]]의 성장은 조지아에 도시 노동자 계층을 만들어냈다. 소작농과 노동자들은 모두 반란과 파업을 통해서 그들의 불만을 표현했고, 1905년에 그들의 불만 표출은 절정에 달했다. 그들의 동기는, 러시아의 통치의 마지막 시기에 조지아에서 가장 유력한 정치 권력자가 된, [[사회주의자]] [[멘셰비키]]에 의해서 옹호되었다. 조지아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 제국의 붕괴로, 미미한 독립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노력의 결과로도, 마침내 그들의 독립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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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만주의 ===
[[파일:Lermontov TiflisGLM.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300px|미하일 레몬쵸프가 그린 트빌리시 풍경화]]
[[로맨티시즘]], 즉 낭만주의가 조지아 문학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레 찹차다브제]], [[그리골 오르벨리아니]]와, 누구보다도, [[니콜로즈 바라타스빌리]]와 같은 유명명한 시인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문학의 부흥을 만끽했다. 그들은 그들의 작업에 영감을 받는데 사용한 잃어버린 철기 시대를 찾아가며 조지아의 과거를 탐구하기 시작했다.바라타슈빌리의 가장 잘 알려진 시중에 하나인 ''베디 카르틀리사''("조지아의 숙명")은 "새장에 속의 나이팅게일의 목소리가 아무리 아름다워 봤자, 그 새에게 무슨 명예로운 기쁨이 있을까?"라는 구절을 통해, 러시아와의 결합에 대하여 그의 깊은 상반되는 감정을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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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의 통치 후반 ==
=== 긴장 고조 ===
[[파일: Tsars Entrance at the Assembly of Gentry in Tbilisi (A).jpg|thumb섬네일|트빌리시의 상유층 회의에서 차르의 출입]]
1881년에는, 개심한 차르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알렉산드르 2세]]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의 인민당원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의 후계자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3세|알렉산드르 3세]]는 훨씬 더 심한 독재자였고 그의 제국에 위협이 될만한 국가의 어떠한 독립 표현에도 난색을 표했다. 더 중앙 집권적인 체제를 알리리는 노력으로, 그는 여느 다른 러시아의 연방국의 지위만큼 조지아의 위상을 떨어뜨리기 위하여, 캅카스의 부왕 제도를 폐지 하였다. 조지아의 언어 연구를 못하게 막았으며, 최상의 이름 "조지아"의 신문 게재가 금지되었다. 1886년에, 조지아인 학생이 불만을 품고 트빌리시 [[신학대학교]]의 총장을 죽였다. 나이들은 드미트리 키피아니는 신학대학교 학생들에 대처하기 위하여 조지아 교회의 수뇌를 비난했는데, 그는 [[스타브로폴]]로 추방되었고, 그 곳에서 비밀리에 암살당했다. 많은 조지아인들이 그의 죽음은 전제군주제의 집행관의 소행이라고 믿고 있었고, 그의 장례식에 엄청난 반-러시아 시위대를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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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1914년 8월에 독일에 대항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전쟁은 조지아에 작으나마 열정을 일깨웠다. 20만명의 조지아인들이 전쟁을 치루기위해 군대에 동원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조지아는 그 충돌로부터 많은 이득을 보지는 못하였다. 11월에는 터키가 독일의 편에 들었고, 조지아는 자신들이 최전방에 있음을 알았다. 대부분의 조지아의 정치인들은 중립을 유지했다. 친독의 느낌과 감정이 의미하는 것은 국민들 사이에서 독립에 대한 염원이 싹트고 있음을 의미했다.
 
[[파일:Georgien Parlament Unabhängigkeit.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400px|조지아 의회에서 독립 선언. 1918년]]
1917년, 러시아의 전쟁 참여가 헛수고로 돌아가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2월 혁명|2월 혁명]]이 일어났다. 오자콤(남캅카스를 위한 비범한 위원회)이라고 불렸던 새로운 일시적인 정부가 남캅카스를 통치하기위해 확장 설치되었다. 트빌리시에서, 도시에 주둔한 대부분의 러시아 군인들이 볼셰비키에게 호의를 갖고 있던 이래로 어떤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러나 1917년에 주둔한 군인들이 조지아를 등지고 북으로 향하게 되자, 조지아는 사실상 러시아의 군대로부터 자유로워졌고, 멘셰비키는 러시아의 수도에서 볼셰비키에게 권력을 가져다 줬던 [[10월 혁명]]을 거부한 멘셰비키당의 영향권에 있었다. 남캅카스는 그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남았다. 그리고 터키의 군대가 1918년 2월에 국경을 가로질러 침입하자, 러시아로부터 분리된 문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1898년 4월 22일에, 납캅카스 의회에서 최종적으로 독립을 위한 투표를 했고, [[남캅카스 민주주의 연방 공화국]]으로 스스로 독립을 선언했다. 그 사실은 한달 동안만 지속되었다. [[조지아 (국가)|조지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으로 구성된 그 세 연방은 각각 그들의 다른 역사, 문화와 목표를 갖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터키의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군대에 침입에 대응하려는 아르메니아의 방어가 가장 중요했다. 반면에 무슬림 아제르바이잔인들은 터키와 서로 마음이 통했다. 조지아는 터키보다는 독일과 교류하여 도래할 독립을 보장하는 것이 최고의 관심사였다. 1918년 5월 26일에, 조지아는 독립을 선언했고, 그 때는 1921년에 볼셰비키가 침입하기 전이었다.<ref>Entire "Later Russian rule" section: Suny Chapters 7 and 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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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조지아의 역사]]
[[분류:러시아의 역사]]
[[분류:1918년 해체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