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 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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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 (1497-1583) ==
[[파일:Matthew-BristolHarbour-Aug2004.jpg|섬네일|
=== 종교개혁 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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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제국 (1583-1783) ==
[[파일:Gilbert plaque.jpg|
1578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험프리 길버트]]에게 바다 건너 새로운 땅의 발견과 답사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그해, 길버트는 해적질에 종사하며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수립할 취지로 [[서인도 제도]]를 향해 떠났다. 하지만, 악천후 탓에 원정이 초반부터 실패하고 말았다. 1583년에 그는 [[뉴펀들랜드 섬]]을 언급하면서 아직 아무 이민자들도 없는 이때에 잉글랜드가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다시 한번 항해 도전에 착수하였다. 길버트는 잉글랜드로 귀국하던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뒤를 이어 의붓형제 [[월터 롤리]]가 1584년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특권을 받았으며, 같은 해 오늘날 [[노스캐롤라이나 주|노스캐롤라이나]] 연안에 [[로어노크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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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ritish colonies 1763-76 shepherd1923.jpg|500x500픽셀]]
잉글랜드가 [[아메리카|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영구정착한 곳은 [[존 스미스 (탐험가)|존 스미스 선장]]이 이끌고 [[버지니아 회사]]가 지원하여 1607년에 건설한 [[제임스타운]]이다. [[버뮤다]]는 1609년에 [[버지니아 회사]] 난파선의 깃발로 인해 1609년에 영유권이 주장 되었고 정착민들이 이주하였다. 이 후 식민지들의 대한 [[버지니아 회사]]의 특권은 1624년에 폐지되었고 [[버지니아 식민지]]의 이름으로 [[잉글랜드]] 군주의 직접 통제를 받게 되었다. 또한, 1610년에 런던 앤 브리스톨 회사가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주|뉴펀들랜드]]를 식민지화 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 하였다.<ref>{{서적 인용|url=https://books.google.ca/books?id=iTZSFcfBas8C&redir_esc=y&hl=en|제목=Trade, Plunder and Settlement: Maritime Enterprise and the Genesis of the British Empire, 1480-1630|성=Andrews|이름=Kenneth R.|날짜=1984-11-29|출판사=Cambridge University Press|쪽=20-22|언어=en|isbn=0-521-27698-5|확인날짜=}}</ref>
1670년에는 [[잉글랜드]]의 [[찰스 2세]]가 왕립 특권을 사용하여 루퍼트 랜드의 [[모피 무역]]의 독점 특권을 [[허드슨 베이 회사]]에게 승인하였다. [[허드슨 베이 회사]]가 건설 하였던 요새들과 무역지점들은 때때로 [[누벨프랑스|뉴 프랑스]] 식민지를 건설한 프랑스인들에게 공격을 받곤 하였다.<ref>{{서적 인용|url=https://www.worldcat.org/oclc/172521635|제목=Canada and the British Empire|성=Buckner|이름=Phillip|날짜=2008|출판사=Oxford University Press|위치=Oxford|쪽=25|isbn=9780199271641|확인날짜=July 22, 2009}}</ref>
그 후 2년 뒤에는 왕립 아프리카 회사가 [[카리브 해]] 영국령 식민지들의 노동력을 충원 하기 위해서 [[찰스 2세]]에게 [[노예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받았다. <ref>{{서적 인용|url=https://www.worldcat.org/oclc/36158589|제목=The British Empire, 1558-1995|성=Owen.|이름=Lloyd, Trevor|날짜=1996|판=2nd ed|출판사=Oxford University Press|위치=Oxford|쪽=37|isbn=0198731345|확인날짜=July 22, 200}}</ref> [[노예제]]는 [[서인도제도]]의 [[대영 제국]]의 식민지를 유지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807년도에 [[노예 무역]]이 금지될 때까지 영국은 3백 5십만명의 노예들을 대서양에서 아메리카로 강제 이주 시켰다. 이는 총 강제 이후된 흑인 노예들의 3분의 1의 양이다.<ref>{{서적 인용|url=https://www.worldcat.org/oclc/51518397|제목=Empire : the rise and demise of the British world order and the lessons for global power|성=Niall.|이름=Ferguson,|날짜=2003|출판사=Basic Books|위치=New York|쪽=62|isbn=9780465023295|확인날짜=}}</ref> 이러한 [[노예 무역]]을 충원하기 위해서 [[대영 제국]]은 [[서아프리카]]에 제임스 섬(James Island), 아크라(Accra) 그리고 분스 섬(Bunce Island)와 같은 요새들을 세우곤 하였다. [[영국령 서인도|영국령 서인도제도]]에 아프리카 흑인종의 비율은 1650년도에 25%에서 1780년도에는 거의 80%까지 육박하였다. [[13개 식민지|13개 식민지 주]]들 또한 같은 기간동안 10%에서 40%까지 아프리카인들이 증가하였다. 이들 중 대부분은 주로 [[13개 식민지]]들 중 남쪽에 주로 정착하였다. 하지만, 열악한 배의 환경과 불규칙적인 식사 제공으로 인해 아프리카에서 건너오는 흑인 노예들 중 7명 중에 1명만이
=== 프랑스와의 범세계적 충돌 ===
[[제2차 백년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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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 전투]]에서 영국군은 [[로버트 클라이브]]의 지휘 아래 프랑스군과 그들의 인도인 동맹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이로써 영국은 [[벵골]]의 지배권을 확립하였고, 인도에 더 많은 군사들을 파견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다음 10년간 단계적으로 지배 아래에 둔 영토를 넓혀갔으며,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지방의 꼭두각시 통치자들을 통해서 80%의 비율로 지방 고유의 인도인 용병들([[세포이]])로 구성된 [[인도군]]의 군사력을 장악하였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1857년까지 인도를 다스렸다.
[[파일:Yorktown80.JPG|섬네일|
=== 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 상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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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은 캐나다에 대한 영국의 정책에 영향을 끼쳤다. 독립 전쟁 동안 왕당파가 캐나다에 대규모적 규모로 쇄도하였다. 제국의 권위를 옹호할 의도로 제정한 [[1791년 제헌법]]을 통해 [[어퍼캐나다]](영어권 지역)와 [[로어캐나다]](프랑스어권 지역) 등 두 공동체 사이의 긴장 상태를 진정시켰다. 동시에 미국의 독립과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고자 캐나다 정부가 대중을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영국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영국 본국과 비슷한 통치체제를 실시하였다. [[영국령 북아메리카]]의 앞날은 [[나폴레옹 전쟁]] 동안 영국이 대서양 무역의 일부를 강제로 장악하려고 시도한 결과, [[미영 전쟁]] 기간에 잠시 절멸할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북방 국경을 확장할 기회를 잡는 데 실패하였다. 이 전쟁은 현재 영국과 미국 사이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한 유일한 전쟁으로 남아 있다.
[[파일:Captainjamescookportrait.jpg|섬네일|
=== 태평양 탐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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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과의 전쟁 ===
[[파일:Sadler, Battle of Waterloo.jpg|섬네일|350px|
[[나폴레옹 전쟁]]은 영국이 승리를 위해 엄청난 양의 자금과 물자를 쏟아부은 전쟁 가운데 하나였다. 프랑스 항구들은 [[영국 해군]]에 의해 봉쇄되었으며, 이는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트라팔가르]]에서 프랑스 함대를 상대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네덜란드를 비롯한 정복 식민지들은 차례대로 공격을 받아 점령되었으며, 1810년 나폴레옹에 의해 합병되었다. 프랑스는 1815년 유럽군들의 연합 공격을 받고 마침내 패배하였다. 대영 제국은 또다시 평화 조약의 수혜자가 되었다. 프랑스로부터는 [[이오니아 제도]]와 [[몰타]](이 둘은 1797년과 1798년에 각각 점유하였음), [[세인트루시아]], [[모리셔스]]를 넘겨받았으며, 스페인으로부터는 [[트리니다드 섬]]과 [[토바고 섬]]을 넘겨받았다. 네덜란드로부터는 [[가이아나]]와 [[케이프 식민지]]를 넘겨받았다. 영국은 프랑스에 [[과들루프]]와 [[레위니옹]]을, 네덜란드에는 [[자와 섬|자바]]와 [[수리남]]을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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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동안 영국의 대(對)아시아 정책은 인도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주변으로 확대하고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영국은 인도를 많은 주요 식민지들과 그 밖의 아시아 식민지들을 개척하는 데 필요한 관문으로 인식하였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대영 제국이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동인도 회사의 군대는 7년 전쟁 동안 영국 해군과 힘을 합쳤으며, [[이집트]]에서 나폴레옹 축출(1799), 네덜란드로부터 [[자와 섬|자바]] 탈취(1811), [[싱가포르]](1819)와 [[말라카]](1824) 획득, [[버마]] 격퇴(1826) 등 인도 밖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가면서까지 협력을 이어갔다.
[[파일:Victoria Disraeli cartoon.jpg|
동인도 회사의 종식은 1857년에 [[세포이]]들이 동물기름으로 바른 소총 탄약통을 받으라는 영국인 지휘관들의 명령에 맞서 [[세포이 반란|폭동]]을 일으킴으로써 앞당겨졌다. 탄약통을 받는 것은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종교적 믿음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포이 반란이 일어난 원인은 단순히 탄약통 수령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인도인들의 문화와 종교는 영국인들의 꾸준한 잠식에 직면하여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으며, 이에 대한 인도인들의 불만이 폭발했던 것이다. 결국, 폭동은 영국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양측 다 큰 손실을 보았다. 폭동을 진압한 후, 영국 정부는 인도를 직접 식민 통치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영국의 빅토리아|여왕 빅토리아]]가 [[인도의 황제|인도의 여황제]]를 겸임하고, 인도를 다스리는 일을 담당하는 [[인도의 연방 총독|연방 총독]]이 임명되면서 [[영국령 인도]]의 시대가 찾아왔다. 동인도 회사는 다음해인 1858년에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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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제국주의]]
[[분류:16세기 설립]]
[[분류: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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