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24번째 줄:
 
== 일생 ==
[[1594년]](선조 27년) [[과거 제도|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597년]](선조 30년) 다시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하여 공주 목사를 거쳤으나 반대자에게 탄핵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당했다.<ref name="dam2">[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5h0102a 허균:Daum]</ref>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불교]]를 신봉하여 논란을 야기(惹起)하기도 했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공신|위성]][[원종공신]] 2등(衛聖原從功臣二等)에 책록되었다. 벼슬은 [[정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광해군]] 때 [[대북]]에 가담하여 실세로 활동하였으나 [[1617년]](광해군 10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으로 가담하였다. 신분제도와 서얼 차별에 항거하려고 서자와 불만하는 계층을 규합하여 [[혁명]]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이를 비판하던 [[기자헌]]을 제거하려다가 역으로 반역을 도모하려했다는 [[기준격]]의 밀고로 [[능지처참]]되었다.
 
그의 문집은 시류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선 왕조]] 치하에서 모두 인멸(湮滅)될 뻔하였으나 그가 죽음을 예상하고 당시 소년이던 외손자 [[이필진]]에게 전해줘서 후대에 전래되었다. 《[[홍길동전]]》(洪吉童傳)과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등을 남겼다. 특히 《홍길동전》은 무명으로 발표하였으나 나중에 [[유몽인]]이 그의 작품이라는 기록을 남겨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