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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압 ==
전라병사와 장흥부사를 사살한 왜구는 5월 하순까지 별 저항을 받지 않고 어란포, 완도, 장흥(長興)·강진, 진도 등을 약탈, 주민을 사살하고 민가를 방화하면서 약탈하다가 이흠례군, 이광식군에 의해 밀리자 다시 말머리를 돌려 [[영암]]으로 침입했다. 한편 당시 조선군 일부 장수들은 변장들이 살해되고 지방관들이 포로로 끌려갔다가 살해된 것을 두려워하여 지원에 소극적이었고, 전세는 지지부진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도순찰사, [[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을 방어사로 임명하고 전주부윤 [[이윤경 (1498년)|이윤경]]을 파견하여, [[영암]]에서 적을 크게 파하여 그들을 몰아내었다. 금군(禁軍) 등 서울의 정예군사를 동원함과 아울러 산직(散職) 무신과 한량(閑良)·공사노(公私奴)·승도(僧徒) 등을 강제 징집하였다. 동시에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전라도 도순찰사(都巡察使), 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을 좌·우도 방어사(防禦使)로 임명하여 내려보내 이들을 토벌하도록 하고, [[부산포]]에 있는 일본인들도 전부 내보내 삼포 왜인의 준동을 방지하고 침입한 왜구의 진공을 막도록 경상도와 충청도에도 각각 장수를 추가 파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