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묘왜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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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1 = [[조선]]
|교전국2 = [[왜구]]
|지휘관1 = [[심연원]] <br /> 한온 <br /> [[이준경]] <br /> [[이윤경 (1498년)|이윤경]]<br /> [[원적]]<br /> [[김경석]] <br /> [[남치훈]] <br /> [[이광식]] <br /> [[이덕견]] <br /> [[이흠례]] <br /> [[정승복]] <br /> 곽흘 <br /> 변협
|지휘관2 = 확인 불명
|병력1 = 확인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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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묘왜변'''(乙卯倭變)은 [[1555년]]([[조선 명종]] 10년) 조선 명종 때 일어난 [[왜구]]의 습격이다. 왜구들이 [[전라남도]] [[해남군]] 달량포를 기습하여 전라남도 영암·강진·진도 일대를 습격하고 10진이 함락되었으며 진도군수 등이 전사하였나 곧 수습, 토벌되었다. 일설에는 [[임진왜란]]의 전조로 간주하기도 한다.
 
일부 왜구는 육지로 상륙했다가 영암에서는 전주부윤 [[이윤경 (1498년)|이윤경]], 이준경, 나주에서는 [[이흠례]], 달량에서는 [[이광식]] 등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러나 왜구들은 말머리를 돌려 [[영암군]], [[진도]] 일대를 약탈했고, 조정에서는 급히 [[이준경]], [[이윤경 (1498년)|이윤경]], [[변협]] 등에게 군사를 내려보내 지원하게 했다. 을묘왜변을 계기로 비상설 기관이었던 [[비변사]]가 상설기관으로 격상되어 [[흥선대원군]] 집권 전까지 상시 운용된다.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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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압 ==
전라병사와 장흥부사를 사살한 왜구는 5월 하순까지 별 저항을 받지 않고 어란포, 완도, 장흥(長興)·강진, 진도 등을 약탈, 주민을 사살하고 민가를 방화하면서 약탈하다가 이흠례군, 이광식군에 의해 밀리자 다시 말머리를 돌려 [[영암]]으로 침입했다. 일부는 [[진도]] 일대를 약탈했다. 한편 당시 조선군 일부 장수들은 변장들이 살해되고 지방관들이 포로로 끌려갔다가 살해된 것을 두려워하여 지원에 소극적이었고, 전세는 지지부진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도순찰사, [[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을 방어사로 임명하고 전주부윤 [[이윤경 (1498년)|이윤경]]을 파견하여, [[영암]]에서 적을 크게 파하여 그들을 몰아내었다. 금군(禁軍) 등 서울의 정예군사를 동원함과 아울러 산직(散職) 무신과 한량(閑良)·공사노(公私奴)·승도(僧徒) 등을 강제 징집하였다. 동시에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전라도 도순찰사(都巡察使), 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을 좌·우도 방어사(防禦使)로 임명하여 내려보내 이들을 토벌하도록 하고, [[부산포]]에 있는 일본인들도 전부 내보내 삼포 왜인의 준동을 방지하고 침입한 왜구의 진공을 막도록 경상도와 충청도에도 각각 장수를 추가 파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