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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京城日報)는 허위보도로서 각 학교의 지원자가 속출한 듯이 전하였고, 각계 지도층 인사들의 이름을 도용하여 학병 지원 권유의 담화문이라는 것을 연일수록 보도하였다.<ref>이경남, 《설산 장덕수》 (동아일보사, 1981) 283</ref> 그러나 보성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의 학도병 징집 실적이 좋지 않자, 총독부는 각 학교의 교수들을 소집하여 훈시를 한다. 장덕수는 소극적으로 협력하는 척 하면서 칼럼 기고 압력을 기피하는 등의 수동적인 저항을 하였다.
 
[[1943년]] 겨울 총독부의 오오노 학무국장과 단게 경무국장이 보성전문 전임교수 전원을 당시 부민관에서 열린 만찬회에 초대하교초대하고 학병 강요를 하고자 출석을 지시했었다.<ref>이경남, 《설산 장덕수》 (동아일보사, 1981) 284</ref> 이 자리에는 당시 친일로 유명한 한국인 기업인 한상룡, 조병상도 참석했다.
 
회의 전에 음식과 술이 나왔지만 식사가 맛있을 리 만무하여 형식적 식사가 되었다. 그런데 장덕수는 평소에 안하던 술을 동석했던 상과 과장 이상훈에게도 권하고, 스스로 마시더니 자작자음하여 안색이 홍당무가 되었다.<ref name="lee285">이경남, 《설산 장덕수》 (동아일보사, 1981) 285</ref> 회의가 한참 진행 중일 때 설산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일으키며 우선 친일분자들을 꾸짖으며, 너희들이 그렇게 충성스러우면 왜 (학생들보다 먼저) 솔선수범하여 지원하지 않느냐고 하고, 다음에는 양 국장(학무국, 경무국장)을 질타하였다.<ref name="lee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