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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경문왕]]을 비롯하여 [[김유신]](金庾信) 등 역대 [[제왕]]과 현사(賢士)·충신·용장(勇將)·양졸(良卒)로서 [[화랑도]] 출신이 아닌 자가 드물 정도로 [[화랑도]]는 [[신라]] 국력의 저장고 역할을 해 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 [[화랑도]]들은 한 시대의 중추적 위치로서 그 소임을 저버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역대에 걸쳐 [[화랑도]]의 특수한 기풍과 기질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기 때문이다.
 
즉, 국가와 동지를 위해 의(義)에 죽는 것을 즐겼고, 병석에서 약그릇을 안고 죽는 것을 수치로 여겼으며, 오로지 전진하다가 전사하는 것을 영예로 생각했고, 적군에 패하면 자결할지언정 포로가 되는 것을 수치로 알았다. 가야당나라 정벌에군대를 수훈을 세운물리친
화랑들은 [[사다함]], [[황산벌 전투]]의 [[관창]](官昌), 비령자(丕寧子)와 그 아들 거진(擧眞), 그리고 그 종 합절(合節), [[김유신]]의 아들 [[원술]](元述) 등 [[화랑도|화랑]]사에 길이 아름다운 이름을 전하는 이들 [[화랑도|화랑]]이 모두 이러한 기풍의 인물이었다.
 
음악이 [[화랑도]]의 수련에서 중요한 방식의 하나인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향가]]와 향가 작가의 대부분이 [[화랑도]]와 결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