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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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위안부는 군과 결탁한 매춘업자가 제공 또는 보급장교가 모집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때까지는 일본 처녀가 아닌 조선 처녀에게는 강제성은 띄지 않았다. 그러다가 전쟁의 확대로 그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일본 군부는 마침내 위안부 차출에 강제력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1941년]] [[7월]] 관동군(關東軍) 24만 명을 75만 명으로 증강시켜 대(對)소련 전략의 일환으로 삼았으며 이 때 관동군 보급담당 참모 하라가 [[조선총독부]]를 방문 조선 '도라지꽃' 2만 명을 요구, 1만 명을 관동군 쪽으로 끌어갔다.<ref name="gongchang199"/> 위안부 여성에 대한 강제 차출은 다른 곳에서도 요구되어 [[타이완 총독부]]와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에서도 위안부 차출이 계속되었다.
 
== 뽀은인력과차출 인력과 지역 ==
[[파일:Entrance of a comfort station.png|섬네일|위안소 입구. '[[성전]] 대승의 용사 대환영' '몸도 마음도 바치는 야마토나데시코의 서비스']]
[[파일:COMFORT Ad.gif|섬네일|위안부 모집 광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