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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설명 =
 
|국가 = {{국기그림|대한민국|1949}} [[대한민국 제5공화국|대한민국]]
|직책 = [[대한민국의 국가정보원장|국가안전기획부장]]
|내각 = [[전두환 정부의 국무위원|노신영 내각]]
|임기 = [[1985년]] [[2월 19일]]~[[1987년]] [[5월 25일]]
|대통령 = [[전두환]]
|총리 = [[노신영]]
|차관 =
'''제1차장'''<br>[[김근수 (1934년)|김근수]] ([[1985년]] [[1월 19일]]~[[1986년]] [[1월 8일]])<br>[[이해구]] ([[1986년]] [[1월 8일]]~[[1987년]] [[5월 29일]])<br>
'''제2차장'''<br>[[손장래]] ([[1985년]] [[5월 20일]]~[[1986년]] [[1월 8일]])<br>[[이학봉]] ([[1986년]] [[1월 8일]]~[[1988년]] [[5월 16일]])<br>
'''제3차장'''<br>[[육완식]] ([[1986년]] [[4월 13일]]~[[1990년]])
|전임 = [[노신영]]
|후임 = [[안무혁]]
 
|직책2 = [[대한민국의 대통령경호처장|대통령경호실장]]
|임기2 = [[1981년]] [[7월 11일]]~[[1985년]] [[2월 19일]]
|대통령2 = [[전두환]]
|전임2 = [[정동호 (1935년)|정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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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무 = [[대한민국 국군]]
|복무기간 = 1960년~1984년
|소속군대 = {{국기그림|대한민국|육군}} [[대한민국 육군|육군]]
|계급 = {{대한민국 국군 계급장|[[중장|육군}}]]
|지휘 = [[특수전사령부]] 제3공수특전여단<br/>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
|근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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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를 16기로 졸업하여 군인이 되었고 1960년대 중반 [[베트남 전쟁]] 당시 중대장과 감찰관으로 다녀왔으며 공수특전여단, [[대통령 경호실]], [[특수전사령부]] 등에서 근무하였다. 그뒤 [[특전사령부]] 작전참모로 재직 중 [[12.12 사태]] 및 [[5·17 비상계엄]]에 개입하였다. 이후 3공수여단장을 거쳐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출범 이후에는 1980년부터 1985년까지 대통령 경호실장을 거쳐 [[대한민국의 국가정보원장|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재직하였다.
 
5공청산 때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자처하였고 [[1993년]], [[1987년]]의1987년의 [[용팔이 사건]]이 밝혀지자 스스로 책임을 지고 감옥에 다녀오기도 했다. [[1995년]] 풀려났으나, 그 해의 12.12, 5.18 관련 수사로 체포되어 다시 투옥되었고, [[1997년]] [[12월]] 석방되었다. [[허삼수]], [[허문도]], [[허화평]], [[박희도 (1934년)|박희도]], [[정호용]], [[노신영]] 등과 함께 [[전두환]]의 최측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장세동도 세월이 가며 전두환의 말을 듣지 않았고 급기야 전두환은 '장세동이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내 말을 안듣는다' 고 하였다.
 
== 생애 ==
=== 초기 활동 ===
[[1936년]]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면에서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려서 [[서울]]로 유학하여 [[성동공업고등학교]]와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60년]] [[2월 23일]] 육사 졸업 후 동시에 [[대한민국 육군|육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북극성회(하나회의 전신)에 참여하였다.
 
=== 군 복무 ===
그뒤 제1공수특전단에서 중대장으로 복무하였고 [[대한민국 육군대학|육군대학]]을 수료하였다.
[[1965년]], 육군 대위로 복무 중 [[베트남 전쟁]]에 다녀왔다. [[1966년]]에는1966년에는 [[4월 19일]]과19일과 [[4월 20일]]에20일에 퀴논 북쪽 24&nbsp;km 탄광 지역에서 어깨에 총격을 당하여 부상을 입었지만 견디면서 전투를 계속, 부대원들의 사기를 올려 [[베트콩]] 43명을 사살하고 1개 중대를 전멸시키는 성과를 올려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ref>"중대장 부상하자 치열한 육박전", 동아일보 1966년 05월 03일자 6면, 정치면</ref>
 
[[1967년]] 육군 수도보병사단 30경비대대 작전장교가 되었고, [[베트남 전쟁]] 당시 육사 출신들이 몸을 사린다는 소문이 돌자 이를 감독하기 위해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다가 [[전두환]]을 만나 그의 충복이 되었다. 이후 육군 제9보병사단에 있다가 귀국, [[육군본부]]의 여러 보직을 거쳐 현역 군인의 신분으로 [[박정희]] 대통령 때의 [[대통령경호실]] 경호관으로 있다가 [[1977년]]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충성심에서나, 두뇌에서나, [[전두환]] 최고의 충복으로 평가받았으며, [[12·12 군사 반란]] 당시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으로 전두환에게 협력하였다. 이때 그는 장태완 등과의 일전도 불사했다 한다. 훗날 1996년의 재판에서 그는 육군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장군이 [[경복궁]]을 공격하려 했을 때에 나는 탱크 한 대 당 72발 씩의 포탄을 적재케 하고, 이미 한 발은 탑재한 상태였다. 일촉즉발의 불바다가 되었을 것'이라 했다. [[1980년]]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특전사령부]] 작전참모로 부임해서는 그해 5월의 [[5·17 비상계엄]]에도 관여하였다. 그 후 육군 준장으로 진급 제3공수특전여단장 보직 중 [[1981년]] [[7월]] 제5대 대통령 경호실장에 임명되었다.
 
=== 정치 활동 ===
{{참고|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
1981년부터 1985년까지 대통령 경호실장을 거쳐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재직하며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의 실세로 떠올랐고, [[노태우]]-[[노신영]]과 함께 전두환의 후계자로 지목될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 [[1983년]] [[8월 5일]]에는5일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동남아시아 5개국 순방길에 사절단 80여명과 함께 대통령 수행원의 한 사람으로 [[버마]]를 방문했다. 그러나 대통령 전두환과 함께 뒤늦게 출발하여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에서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귀국 후 그해 [[10월 15일]]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아웅산 참사]]를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으나 전두환이 반려시켰다.
 
[[1984년]] [[12월 7일]] 육군 소장에서 육군 중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예편하였다. 그는 예비역의 신분으로 대통령 경호실장을 계속하다가 [[1985년]] [[2월 18일]] 대통령 경호실장직을 사퇴했다. [[2월 19일]]에는19일에는 [[노신영]]의 뒤를 이어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전격 발탁되었다. 안기부장으로 재직하면서 [[금강산 댐]]과 [[평화의 댐]] 공작, [[수지 김 사건|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용팔이 사건]] 등 각종 정치공작 및 간첩조작 사건을 일으켰다.
 
[[1986년]]부터는1986년부터는 [[전두환]]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대표최고위원 [[노태우]]와 공공연히 신경전을 벌이며 갈등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 [[6.10 항쟁]] 과정에서 [[박종철]]이 사망하자 학생들의 데모는 격화되었고, 장세동은 스스로 책임을 지고 안기부장에서 사퇴했다. 당시 야당 인사들과 학생 운동권들은 이를 두고 "죽은 [[제갈량|공명]]이 산 [[사마의|중달]]을 쫓아냈다"에 비유해 "죽은 종철이 산 세동을 쫓아냈다"라고 평했다.
 
=== 6공 이후 ===
{{참고|5공 청문회|일해재단청문회}}
[[1988년]]의1988년의 5공청문회에 참여하였으나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의 추궁에 모른다로 일관하였다. [[1988년]] [[11월 4일]]부터4일부터 5차례에 걸쳐 진행된 <일해(日海)재단청문회>에도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당시 회장 등과 함께 증인으로 소환되었으나 모르쇠로 일관하였다. 한편 그는 자신을 처벌하려는 여론이 높아지자 [[노태우]] [[대통령]]을 향해 "가만히 있어라. 내가 입을 열면 여러 사람이 다친다"고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3년]] [[2월]] [[1987년]] [[4월]]의4월의 [[신한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인 [[용팔이 사건]]에 [[안기부]] 직원들이 개입한 사실이 밝혀지고, 이택돈 등이 검거되자 장세동은 그해 [[3월]] 내 선에서 처리된 사건이라고 밝히고 윗선은 없다며 스스로 경찰에 출석, 기소중지로 풀려났다. 이후 민주당에서는 그를 경찰에 고소했고, 원심은 1년 6월형이 내려졌으며 거듭된 항소심 재판 끝에 [[1994년]] [[4월 12일]] [[대법원]] 형사 2부에서 최종형 확정을 받고 1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
 
그는 운동 전까지 책만 읽었고 교도관들에게 절대 반말을 쓰지 않았다. 그는 거의 흐트러짐 없이 행동하여<ref>[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210091947141310 현진영이 감옥서 만난 장세동은? “감옥내 인지도 대통령 수준”]</ref> 화제가 되었다. 다른 고위층들과 달리 사식을 반입하지 않았고 교도관이나 사무원에게 욕설 한마디 하지 않았다.
 
석방 직후 [[1995년]]부터1995년부터 서석재, 박계동 등의 폭로로 전직 대통령 비자금을 수사하는 가운데 다시 [[12.12 군사 반란]]과 [[5.18 내란]] 관련 수사를 받았으며 [[1996년]] [[12.12 군사 반란]]과 [[5.18 내란]]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어 [[1997년]] [[4월]] 대법원 재판에서 징역 3년 6월형을 확정 선고받았으나 그 해 [[12월]] 정권교체 후 사면, 복권되었다. 사면 직후 [[전두환]]의 집을 방문하여 "신고합니다. 각하! 휴가 잘 다녀 왔습니다!"고 휴가 잘 다녀왔다고 거수 경례하여 화제가 되었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가자 으뜸의 나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대선을 하루 앞두고 후보직을 공식 사퇴하였고, 이후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서초구 을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그해 [[4월]]의 선거에서 3위로 낙선하였다.
 
== 평가 ==
[[1980년대]] 5공청문회 때 노무현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 의 집요한 질문에 '기억이 안 난다'고 모르쇠로 일관하여,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는 운동권의 비판과 함께 한편으론 신군부 최고의 충신이라는 평도 들었다. 그는 5공 청문회장에서 "사나이는 자신을 알아준 사람을 위해 죽는 법이다", "차라리 내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는 한이 있어도 각하가 구속되는 것은 막겠다"고 하여 화제를 불러모으기도 했다.
 
장세동에 대해서는 의리와 충성스런 인물로 평가를 받았었지만, 전두환의 권력을 잃고 국민들에게 비판을 받고 있는 시점부터는 전두환과 관계가 소원해졌다. 이는 다시 말해 장세동은 전두환이라는 사람에 충성한 것이 아니라 전두환의 힘을 충성한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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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세동을 연기한 배우들 ==
* [[백준기]] - [[1995년]]-[[1996년]] ([[제4공화국 (드라마)|제4공화국]]) [[MBC]] 드라마
* [[이동신]] - [[1998년]]-([[삼김시대 (드라마)|삼김시대]]) [[SBS]] 드라마
* [[김성일 (1961년)|김성일]] - [[1995년]] ([[코리아게이트 (드라마)|코리아게이트]]) [[SBS]] 드라마
* [[홍학표]] - [[2005년]] ([[제5공화국 (드라마)|제5공화국]]) [[문화방송|MBC]] 드라마
 
== 역대 선거 결과 ==
207번째 줄:
|대수 = 5
|직책 = [[대한민국의 대통령경호실장|대통령경호실장]]
|임기 = [[1981년]] [[7월 11일]] ~ [[1985년]] [[2월 19일]]
}}
 
215번째 줄:
|대수 = 13
|직책 = [[대한민국 국가안전기획부|국가안전기획부장]]
|임기 = [[1985년]] [[2월 19일]] ~ [[1987년]] [[5월 2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