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조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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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보내 주신) 지도를 자세히 펴 보니 팔도의 산하가 눈앞에 와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고인이 말한 바 ‘서너 걸음 문을 나서지도 않았는데 강남 수천리가 다하였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기쁘고 고마운 마음을 표할 길이 없어 삼가 표피 1영을 보내니 웃으며 거둬 주시기 바랍니다<br /><br />(1755년 11월 그믐날)<ref name="dyletter"/>}}
 
그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냈던 편지들 중에는 우울증을[[우울증]]을 호소하는 대목도 나온다.<ref name="dyletter"/> 1756년 2월 29일, 사도세자는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서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민망해할 따름입니다”라고 썼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6년 전 고백이다. 편지에는 아버지 영조에 대한 불만도 자세히 기록돼 있다. 사도세자는 만 14세인 1749년 장인에게 쓴 편지에서 “내 나이 올해로 이미 15세의 봄을 넘긴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아직 한번도 숙종대왕의 능에 나아가 참배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적었다.<ref name="dyletter"/> 여기에 대해서는'사도세자는 숙종대왕의 능에 참배하지 못하니 자신이 세자인지 자격지심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가 있다. 아버지의 갈등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대목이라는 게 학계의 설명이다.<ref name="dyletter"/> 그러나 홍봉한이나 그의 집안에서는 사도세자의 서신에 응답하지 않았다. 도리어 혜경궁 홍씨 등은 사도세자의 행동을 자신의 친정에 알렸고, 이는 후일 일부 사학자들에 의해 음모론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노론]]의 대신들 역시 그의 실수와 비행을 영조에게 고해 바쳤다. [[정성왕후]] 생존에는 유화적이었지만, [[정성왕후]]가 죽은 후에는 영조와의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 세자궁에 있던 관료 조유진은 형수이기도 한 [[효순왕후|효순 현빈]]의 친정 조카였는데 사도세자는 그를 통해 자신의 형수의 동기간인 [[조재호 (조선)|조재호]]와 연결, 서신을 주고받게 된다. [[소론]]계열이었던 [[조재호 (조선)|조재호]]는 좌의정, 판중추 등을 지낸 인물로 정순왕후의 책봉에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춘천]]으로 은퇴하였다가, 후에 사도세자의 구원요청을 받고 한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사도세자를 구원하지 못하고 오히려 역공을 당해 사사된다.
 
한편 사도세자는 영조 즉위의 의리와 명분에 관련된 신임사화에신임환국에 대해 부왕과는 다른 의견을 내놓아내놓았는데, 이 때문에 대립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이 때 [[김상로]], [[홍계희]], [[문성국]], [[김한구]], [[김귀주]] 등은 그를 수시로 탄핵, 비판하였고, 시댁이 소론 계열이었던 [[화완옹주]] 역시 그를 공격하는데 가담했다고 한다.(하지만 화완옹주가 사도세자를 모함했다는 증거는 다소 명확하지 않아서 추측에 불과하다않다.) 이에 그를 싫어하는 노론 당원들과 이에 동조하는 [[정순왕후 (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숙의 문씨 (영조)|숙의 문씨]](淑儀 文氏) 등이 영조에게 세자를 무고하여 영조가 수시로 불러 크게 꾸짖었다 한다.
 
한편 [[당색]]으로는 [[노론]]이었던 [[혜경궁 홍씨]] 역시 세자에 대한 정보를 빼내 [[홍봉한]], [[홍인한]] 등에게 제공했다.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던 사도세자는 형수인 [[효순왕후|효순현빈 조씨]]의 남동생이자, 영조가 탕평파로서 총해하던 [[조문명]]의 아들 [[조재호 (1702년)|조재호]] 등에게 도움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