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조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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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보내 주신) 지도를 자세히 펴 보니 팔도의 산하가 눈앞에 와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고인이 말한 바 ‘서너 걸음 문을 나서지도 않았는데 강남 수천리가 다하였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기쁘고 고마운 마음을 표할 길이 없어 삼가 표피 1영을 보내니 웃으며 거둬 주시기 바랍니다<br /><br />(1755년 11월 그믐날)<ref name="dyletter"/>}}
그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냈던 편지들 중에는
[[노론]]의 대신들 역시 그의 실수와 비행을 영조에게 고해 바쳤다. [[정성왕후]] 생존에는 유화적이었지만, [[정성왕후]]가 죽은 후에는 영조와의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 세자궁에 있던 관료 조유진은 형수이기도 한 [[효순왕후|효순 현빈]]의 친정 조카였는데 사도세자는 그를 통해 자신의 형수의 동기간인 [[조재호 (조선)|조재호]]와 연결, 서신을 주고받게 된다. [[소론]]계열이었던 [[조재호 (조선)|조재호]]는 좌의정, 판중추 등을 지낸 인물로 정순왕후의 책봉에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춘천]]으로 은퇴하였다가, 후에 사도세자의 구원요청을 받고 한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사도세자를 구원하지 못하고 오히려 역공을 당해 사사된다.
한편 사도세자는 영조 즉위의 의리와 명분에 관련된
한편 [[당색]]으로는 [[노론]]이었던 [[혜경궁 홍씨]] 역시 세자에 대한 정보를 빼내 [[홍봉한]], [[홍인한]] 등에게 제공했다.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던 사도세자는 형수인 [[효순왕후|효순현빈 조씨]]의 남동생이자, 영조가 탕평파로서 총해하던 [[조문명]]의 아들 [[조재호 (1702년)|조재호]] 등에게 도움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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