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 공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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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lbertus-Schild.jpg|150px|오른쪽|섬네일|알브레히트 프로이센 동판 초상화]]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와 [[쿨름바흐]], [[바이로이트]]의 [[후작]] [[프리드리히 2세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쿨름바흐|프리드리히 2세]]의 셋째 아들이었던 알베르트는알브레히트는 청소년기에 [[쾰른 대성당]]에서 그리스도교적 규범을 배웠으며, 주로 [[쾰른]] 선제후 헤세의 헤르만 4세의 궁정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헤세의 헤르만 4세로부터 [[쾰른 대성당]]의 캐논에 임명되었다. 그는 성당의 캐논직에 있었으나 [[수학]]과 [[과학]]에 관심이 있었고, 과학적 이론에 심취하여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해 반박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의 수학, 과학에 대한 흥미는 다른 성직자들에게도 알려졌지만, 일부 성직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1508년]]에는 황제 막시밀리안 1세를 따라 이탈리아를 다녀왔으며 얼마 뒤에 헝가리에 도착했다. [[1510년]] [[튜튼 기사단]]의 그랜드마스터이며 [[작센]] [[공작]]인 [[프리드리히 1세 (튜튼 기사단)|프리드리히 1세]]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1510년]] [[12월]] [[프리드리히 1세 (튜튼 기사단)|프리드리히 1세]]의 사망과 동시에 알브레히트는 16년간 제37대 [[튜튼 기사단]]의 단장으로 봉직했다. 그를 튜튼 기사단장에 임명한 것은 튜튼 기사단의 영지가 폴란드의 국경에 인접해 있으므로, 기사단과 그의 외삼촌과의 충돌을 해결하길 원한 선택이기도 했다. 그가 기사단장에 취임할 때, 취임 조건으로 그는 [[폴란드]]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하지 말라는 조건이 붙었다. 그는 [[1527년]] 튜튼 기사단 그랜드 마스터직을 [[발터 폰 카론부르크]]에게 물려주었다. 그는 [[기사]]이자 [[사제]]의 신분으로, 그에게는 영지가 없었다. 또한 [[1517년]]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쿨름바흐|프리드리히 2세]]가 두 형 [[카지미르 폰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카지미르]]와 [[게오르크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게오르크 경건공]]이 일으킨 [[쿠데타]]로 축출되면서, 별다른 영지를 받지 못한 알브레히트는 [[튜튼 기사단]]에 전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