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2세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쿨름바흐 변경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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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활동 ===
[[파일:Sophia Jagiellon, Margravine of Brandenburg-Ansbach.PNG|썸네일|100px|왼쪽|부인 [[폴란드]]의 공주 [[소피아 야기에우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와 그의 두번째 부인인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 (작센)|프리드리히 2세]]의 딸 [[안나]]의 차남으로 [[바이에른]]의 [[안스바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에게는 넷째 아들이었다. 하지만 배다른 형들은 [[요한 키케로치체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려서 요절했다. 일찍이 [[1473년]] 그의 이복 형 [[요한 키케로치체로]]는 [[프랑크 족]]의 관습법인 [[살리카 법]]의 적용범위가 어디까지인가를 알아보고, 법학자들을 통해 프리드리히의 몫을 정하려 했다. [[1479년]] [[2월 14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폴란드]]의 왕 [[카지미에시 4세]]와 [[엘리자베스엘리자베트 폰 합스부르크]]의 딸인 [[폴란드의 소피아 야기에우워]](Sophia Jagiellon)와 결혼했는데, 그는 [[지그문트 1세]]의 친여동생이다. [[1468년]] [[카지미에시 4세]]는 정략결혼 목적으로 자신의 딸 소피아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막시밀리안 대공과 약혼시켰지만 뒤에 파혼하고, 그에게 시집보냈다. 프리드리히의 아버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백작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는 [[신부 가격]]으로 64,000 [[플로린]]을 [[카지미에시 4세]]에게 지불했다. 결혼식 후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는 [[폴란드의 국왕]] [[카지미에시 4세]]에게 [[결혼 지참금]]을 요구했다. 자금이 부족했던 [[카지미에시 4세]]는 지참금을 할부로 지불하겠다고 약속, [[1479년]] [[12월 25일]] 6000 [[굴덴]]을 먼저 [[브란덴부르크]] [[백작]]령에 입금했다. 그러나 나머지 [[결혼 지참금]]은 받지 못했다.
 
프리드리히는 아내 [[폴란드의 소피아 야기에우워]]와의 사이에서 11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둘째 엘리자베스엘리자베트, 일곱째 바바라, 열여섯째 [[프리드리히 알베르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다. 프리드리히는 [[폴란드]]식의 이름도 있었는데 [[폴란드]]에서는 '''프레드릭 스타헤르 호엔졸레른'''(Fryderyk Starszy Hohenzollern)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그밖에 폴란드에서는 그를 가리켜 카이제 바이로이트(książę (Fürst) Bayreuth)라고 불렀다. 폴란드와의 인연으로 그는 [[호엔촐레른 가문]]이 프로이센을 획득하는 바탕을 제공한다.
 
그는 14세기 중엽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가문에서 갈라진 몇몇 분가의 시조였다. 자녀가 많았던 프리드리히는 13남 프리드리히와 14남 빌헬름, 15남 요한 알브레히트를 모두 [[가톨릭]] 성직자로 출가시켰다. 이 중 빌헬름과 요한 알베르트는 [[대주교]]를 역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남 [[카지미르 폰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카지미르]]의 가계는 [[1544년]]에 손자 [[알브레히트 알키비아데스]]가 후손을 낳지 못하고 죽어 단절되고, 둘째 아들 [[게오르크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게오르크 경건공]]의 가계는 [[1603년]]에 프리드리히의 손자이자 게오르크의 아들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가 역시 자녀를 낳지 못하고 죽어 후계가 단절되었다. 여섯째 아들 [[요한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는 군인으로 활약했지만 자녀 없이 사망했다. 다섯째 아들인 [[튜튼 기사단]]장이자 첫 [[프로이센]]의 공작인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은 자기 외삼촌 [[지그문트 1세]]에게서 [[프로이센]]의 영토를 확보했지만, 역시 그 아들인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가 딸만 다섯 명을 낳고, 아들들은 어려서 요절하는 바람에 그의 남자 후손은 17세기 초엽에 모두 전멸되었다. 그 중, 손자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딸 세명은 프리드리히의 배다른 형 [[요한 키케로치체로]]의 남자 후손들과 결혼하여 부분적으로 그의 혈통은 일부 [[호엔촐레른 왕조]]의 [[프로이센의 국왕]]들과 [[독일 황제]]들에게로 이어진다.
 
[[1482년]] 봄부터 그 해 가을까지 그는 [[로마 가톨릭]] [[성지 순례]]를 다녀왔다.
 
[[1509년]] [[3월]] 프리드리히는 부인 [[소피아 야기에우워]]와 함께 처조카 [[루드비코 2세 (폴란드)|루드비코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1512년]] [[10월 5일]] 부인 [[소피아 야기에우워]]가 사망했다. 이후 프리드리히는 재혼하지 않고 혼자 지냈다. 아내 소피아 야기에우워가 죽은 뒤 프리드리히는 저녁마다 폭식했는데, 프리드리히는 매일 저녁 1500잔 이상의 와인을 마셨고, 야생 [[오록스]] 소고기 2마리분과 600여 마리의 생선을 먹었다고 한다. 부인 [[소피아 야기에우워]]의 여동생은 [[바바라 야기에우로]]로 [[작센]] [[공작]]인 [[게오르크 수염공]]과 결혼한 바바라의 딸 [[막달레나 폰 작센]]은 프리드리히의 조카손자인 [[요아힘 2세 헥토르헥토어]]와 결혼했다.<ref>[[요아힘 2세 헥토르헥토어]]와는 서로 종조부와 조카손자간이면서 동시에 처조카와 처이모부 간이 되기도 한다.</ref>
 
=== 안스바흐와 쿨름바흐의 통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