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그레고리오 15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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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그레고리오 15세'''(<small>[[라틴어]]:</small> Gregorius PP. XV, <small>[[이탈리아어]]:</small> Papa Gregorio XV)는 제234대 [[교황]](재위: [[1621년]] [[2월 9일]] - [[1623년]] [[7월 8일]]{{sfn|Baynes|Smith|1880|pp=178–179}})이다. 본명은 '''알레산드로 루도비시'''(<small>[[이탈리아어]]:</small> Alessandro Ludovisi)이다.
 
== 생애 ==
=== 생애 초기 ===
알레산드로 루도비시는 1554년 [[볼로냐]]에서 [[사모지아]](오늘날의 [[사비뇨]])의 백작 폼페오 루도비시와 카밀라 비안키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총 일곱 명의 형제 중에서 셋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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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년 9월 19일 교황 바오로 5세는 그를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폰티나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했다.
 
== 교황 ==
=== 교황 선출 ===
자신의 주교좌 소재지인 볼로냐에 있던 그는 교황 바오로 5세가 선종했다는 소식에 로마로 갔다. 그리고 콘클라베에서 새 교황으로 선출되어 자신의 이름을 그레고리오 15세라고 명명했다. 그의 즉위식은 1621년 2월 14일 수석 부제급 추기경 안드레아 바로니 페레티 몬탈토 추기경의 집전 아래 거행됐으며, 이어서 같은 해 5월 14일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로마 주교좌 착좌 미사를 봉헌했다.
 
[[파일:Bust of Pope Gregory XV by Bernini 1621.jpg|섬네일|left왼쪽|150px|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제작한 그레고리오 15세의 흉상]]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당시 그는 이미 67세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건강 상태가 좋지 못했다. 따라서 교황청에서 그를 돕기 위해 그가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힘있는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레고리오 15세는 자신의 조카인 25세의 청년 [[루도비코 루도비시]]가 그에 걸맞는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족벌주의]]의 위험을 감수하고 교황으로 즉위한지 사흗날에 그를 추기경에 서임했다. 같은 날, 교황의 어린 동생 [[오라치오 루도비시]]는 교황군을 이끄는 [[교회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sfn|Ott|1910}}
 
[[파일:Galeriapapal GregorioXV.jpg|섬네일|right오른쪽|150px|교황 그레고리오 15세와 그의 조카 [[루도비코 루도비시]] 추기경]]
루도비코는 자신을 등용해 준 교황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가톨릭 백과 대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루도비코는 자기 가문의 이익을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지만, 교회의 복지 문제에 있어서 뛰어난 능력과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교황을 위해 충심으로 헌신했다고 한다.{{sfn|Ott|1910}} 그레고리오 15세는 공작령 두 곳을 확보한 다음 1621년 자신의 동생 오라치오를 로마 귀족 및 [[피아노로마노]] 공작에 임명했으며, 1622년에는 조카 루도비코 루도비시가 [[콜론나 가문]]으로부터 구입한 [[차가롤로]] 공작에 또 다른 동생을 임명했다. 루도비코 외에 또 다른 조카인 [[니콜로 루도비시]]는 1632년 3월 30일 피옴비노 공작 및 이솔라델바 영주의 상속녀와 혼인해 그 지위를 물려받았다.
 
=== 활동 ===
그레고리오 15세는 개신교도들에 맞서 싸우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 (신성 로마 제국)|페르디난트 2세]]와 [[가톨릭 제후연맹]]을 돕기 위해 금화 백만 두카드를 보내고, [[오스만 제국]]과 대립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 [[지그문트 3세 바사]]를 원조한 것 외에는 유럽의 정치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sfn|Baynes|Smith|1880|pp=178–179}} 1623년 3월 20일 그레고리오 15세는 요술 행위에 반대한 교황의 마지막 법령인 《전능하신 하느님》(Omnipotentis Dei)을 반포했다. 요술 행위에 대한 형벌은 과거보다 줄었으며, 처벌 대상을 ‘악마와 계약을 맺은 것으로 판명된 사람이나 악마의 도움으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로 국한했다.{{sfn|Ott|1910}}
 
박식한 신학자였던 그레고리오 15세는 개혁 정신을 천명했다.{{sfn|Baynes|Smith|1880|pp=178–179}} 대표적인 예로 1621년 11월 15일자로 발표한 교황 칙서 《영원하신 성부의 성자》(Aeterni Patris Filius)는 비밀 투표로 결정되는 콘클라베에서 철저한 검토와 타협, 환호 등 세 가지 선거 방식만을 허용했다. 1622년 1월 6일 그레고리오 15세는 선교 정책을 담당하는 [[인류복음화성|포교성성]]을 설치했다.{{sfn|Ott|1910}} 포교성성은 한 달에 두 차례, 교황과 한 달에 한 번 회의를 열었고 각 선교 지역의 정보와 파견지, 파견할 인물이나 수도회 등을 결정하고 선교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그는 [[아빌라의 데레사]]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냐시오 데 로욜라]], [[필립보 네리]], [[이시도로 농부]]를 [[시성 (기독교)|시성]]했다. 또한 그는 [[알칸타라의 베드로]]를 시복했다. 그는 볼로냐의 미술가 [[구에르치노]]를 로마로 불러들여 바로크 양식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잔 로렌초 베르니니]]와 [[알레산드로 알가르디]]로 하여금 자신의 흉상들을 제작해 [[산타 마리아 인 발리첼라 성당]]에 장식품으로 놓았다.
 
=== 죽음 ===
[[파일:Tomb of Pope Gregorius XV.jpg|섬네일|right오른쪽|165px|그레고리오 15세의 무덤]]
그레고리오 15세는 1623년 7월 8일 [[퀴리날레 궁전]]에서 선종했으며, [[산티냐시오 성당 (로마)|산티냐시오 성당]]에 안장되었다. [[교황 우르바노 8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sfn|Baynes|Smith|1880|pp=178–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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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교황 그레고리오 15세| ]]
 
[[분류:1554년 태어남]]
[[분류:1623년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