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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과 가계 배경 ==
[[1858년]] [[7월 17일]] [[경기도]] [[광주군 (경기도)|광주군]] [[낙생면]] 백현리(현재의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ref name="leepengchosun">[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508/200508040042.html 조선일보 : 판교 이완용 생가터 처리 고심 --2005년 8월 4일 사회면 기사] {{웨이백|url=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508/200508040042.html |date=20130705034932 }}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이 2001년 성남시 의뢰를 받아 작성한 '성남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보고서 가운데 '이완용 생가'편에는 1쪽 분량의 이완용 소개글 속에 '현재의 생가는 백현동 아랫말 뒷가게인 이모씨의 집으로, 옛 집은 헐리고 새로 지은 것'이라고 적혀있다. 성남시는 원주민 구증을 토대로 “이완용 생가는 백현동 226의 1(자연녹지)로, 한국전쟁 때 소실된 뒤 다른 사람이 신축했으며 최근까지 기와지붕의 허름한 주택에 이모씨가 살다가 보상을 받고 이사했다”고 밝혔다.</ref><ref name="brother">[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85_037316&curSetPos=0&curSPos=1&isEQ=true&kristalSearchArea=B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이면용 편] 이완용의 친형 이면용(李冕用)은 1885년 을유년 [[조선의 과거 제도|식년시]] 진사과에 합격했는데, 그의 출신지가 경기도 광주군(廣州)으로 기재돼있음이 확인되므로 이완용의 고향은 현재 판교가 맞으며 [[이병도|두계 이병도]]의 익산설은 분명한 거짓임을 밝혀둔다.</ref><ref name="yun">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ref>{{rp|22}}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이석준(본명은 이호석[李鎬奭])이고 생모는 신씨(辛氏)였다. 그리고 친형제로는 15살 터울의 큰형 이면용(李冕用) 등이 있었다<ref name="brother"/><ref>『숭정기원후5을유식년사마방목(崇禎紀元後五乙酉式年司馬榜目)』(장서각[B13LB 5])</ref>.
 
그의 먼 직계 조상들은 고관을 역임했는데<ref name="yun" />{{rp|23}}, 16대조 이교는 판서, 15대조 이방년은 밀직부사, 14대조 이순은 감사를 역임했으며 [[조선 성종|성종]] 때의 청백리였다. 11대조 이세명은 [[기묘사화]]에 연루된 선비였으며, 10대조 이한(李僴)은 무과에 급제해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9대조 이의원과 8대조 이우는 명예직인 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2품)에 제수(除授)되었는데, 그 후 이완용의 직계에선 더는 문무 양과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해 몰락한 양반 상태였고 가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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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3월 11일]] 러시아의 압력에다 대미 협상 실패의 책임을 지고 내각에서도 차츰 밀려난 그는 급기야 전북 [[관찰사]]로 좌천됐다. 부임 5일만에 직무태만 혐의로 감봉 처분을 받았고, 공금횡령죄까지 뒤집어써 그나마도 파직될 뻔했으며 그해 7월 11일에는 아예 독립협회로부터 제명당하기까지 이른다.
 
[[1901년]] 2월 의정부(議政府) 참정(參政-정1품)이던 아비 이호준이 노환으로 갑자기 쓰러졌다. 고종 황제는 총신 이호준의 후계를 잇게 하려고 급히 이완용을 사면복권시켜 궁내부(宮內部) 특진관(特進官)으로 불러 올렸다. 이호준은 얼마안가 81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이완용은 3년 부친상을 위해 의원면본관(意願免本官)<ref group="*">의원면본관(意願免本官): 스스로 원하여 관직을 그만두는 일</ref><ref>[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HSS/HSS19010225u00_01.pdf 황성신문 1901년 2월 25일자 궁정녹사(宮廷錄事) 지면 기사 발췌] {{웨이백|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HSS/HSS19010225u00_01.pdf |date=20160307212145 }}: 宮內府特進官 李完用自引疏 批旨省疏具悉往事何必爲引卿其勿辭行公 부분</ref> 해 정계를 다시금 떠났다. 이호준은 양아들이나 적장자인 이완용에게 자신의 모든 정치적 지위와 집안 제사를 잇게 했고, 서자이긴 하나 친아들인 [[이윤용]]에게는 자신의 장남으로서 막대한 재산을 모두 물려줬다<ref name="yun" />{{rp|261}}.
 
이완용은 빈손으로 가솔들을 이끌고 양아버지의 고래등같은 저택을 떠나, 남대문 밖 잠배골(<small>현재 [[중구 (서울)|중구]] [[중림동]]</small>), 즉 당시 한양의 어물전이 몰려있던 칠패시장 근처에 그리 크지 않은 집을 구했다. 잠배골은 현재 [[아현역]]과 [[서울역]] 사이에 자리한 지역으로 당시에는 번잡하고 못사는 동네였으나 구한말 최초로 [[설렁탕]] 전문 식당들이 자리잡은 곳이기도 했다<ref>[http://media.daum.net/life/food/restaurant/newsview?newsId=20131223151719042 서울 설렁탕 열전 "뜨끈한 국물이 생각날 때"] 주간동아 2013년 12월 4째 주 기사, 글:푸드칼럼니스트 박정배</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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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17일]]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서 일본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지시를 받고, 일본군의 무력시위를 배경으로 어전회의를 열어 고종을 협박{{출처|날짜=2018-05-06}}, 을사조약에 서명하게 했다. 많은 유생들이 을사오적 이완용을 처벌하라며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는데, 그는 '시국에 따라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며 조선의 외교권은 힘을 키워 다시 도로 찾으면 된다'고 항변했다고 한다.{{출처|날짜=2018-05-06}}
 
그러나 을사조약으로 이완용이 과거 [[1888년]] [[1월 19일]] 손수 마련했고 [[1889년]] [[2월 13일]]에 이전할 때도 직접 참여했었던 대한제국주미공사관이 단돈 5달러라는 푼돈에 일본에 강제 매각됐다<ref>[http://mediabuddha.net/m/view.php?bo_table=04_1&wr_id=205&page=1 '워싱턴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잃어버린 2년 10개월 찾았다!'] {{웨이백|url=http://mediabuddha.net/m/view.php?bo_table=04_1&wr_id=205&page=1 |date=20131002101132 }} -미디어붓다 2013년 4월 25일 기사 이학종 기자</ref>. 워싱턴 뿐만이 아니었다. 영국 일본 등 10여 개의 모든 재외 공관이 일본에 즉시 양도 폐쇄되는 국가적 치욕이 기다리고 있었다.<ref>[http://m.segye.com/content/html/2012/08/28/20120828022224.html 日, 을사조약 전부터 대한제국 해외공관 폐쇄계획] -2012년 8월 28일 세계일보 신동주 기자</ref> 이제 대한제국과 일제의 강제 병합은 시간 문제였다.
 
=== 총리대신 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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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부터 이완용의 후손들은 캐나다로 이민간 장손주 이윤형을 대표로 조상땅찾기 소송을 시작했다. 그들은 [[1992년]] [[서울대학교]]를 상대로 [[경기도]] [[고양시]] 임야 2만 5천평에 대한 반환청구 소송을 냈다가 패소했고, 다시 [[1998년]] 7월에는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일대 토지 2372m<sup>2</sup>(약 712평)에 대한 반환청구 소송을 내 승소했다. 반환받은 토지는 즉시 제3자에게 매각, 약 30억원의 매매 이익을 얻었다고 한다. 아직도 이완용과 [[송병준]] 등 친일파의 후손들은 친일 환수 재산 반환 소송을 여러 개 준비중이다<ref>[http://weekly.hankooki.com/lpage/cover/200501/wk2005012716352937040.htm {끝나지 않은 친일 논란} 친일파'더러운 땅' 되찾는다 -2005년 1월 27일 주간한국 기사]</ref><ref>[http://media.daum.net/society/view.html?cateid=1067&newsid=20100701180509322&p=segye&RIGHT_SOC=R5|친일파 이완용 송병준 소유토지 중 해방후 국가귀속 0.3%에 그쳐 -2010년 7월 1일 세계일보 기사]</ref>.
 
[[2008년]] 12월, [[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인 옛 대한의원 때 일본인 의사가 작성한 흉부외과 수술 차트<ref name="chosun01">[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2/18/2008121800585.html "서울대병원, 매국노 이완용 수술기록 발견" --2008년 12월 18일 조선일보 기사]{{깨진 링크|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2/18/2008121800585.html }}</ref>가 발견됐다. 해당 기록은 [[1909년]] [[12월 22일]] 피습 당일 이완용의 것이라고 [[서울대학교병원]] [[흉부외과]] 김원곤 교수가 18일 언론에 밝혔다.<ref name="chosun01"/> 이는 한국 의료 역사상 최초의 흉부외과 기록으로<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2/18/2008121800191.html "한국 첫 흉부외과기록 발견…환자는 이완용" -2008년 12월 18일 조선닷컴 기사]</ref>, 단순의료기록이라기보다 검사 측 요구로 재판에 채택된 감정서 성격이 큰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ref name="chosun01"/>
 
== 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