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홍: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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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일]] [[우참찬]]으로 승진<ref>연산군일기 63권, 연산군 12년(1506 병인 / 명 정덕(正德) 1년) 7월 24일(신축) 1번째기사 "임사홍 등을 승진시키다"</ref> [[7월 29일]]에는 다시 [[좌참찬]]이 되었다. [[8월 17일]] 지사로 전임하였다가 닷새만에 [[예문관]]의 제술을 맡아보게 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촉체(蜀體) 해서(楷書)에 능하였으며, 작품으로는 광주의 [[서거정]]의 묘비명, [[금천]]의 [[노사신]]의 [[신도비]]문, 양주의 박중선묘비문, 광주의 이계손묘비명, 한확 묘비명, 연천의 영원윤호묘비명, [[월산대군]]의 비명 등이 전한다. 이후 [[정승]]의 물망에 올랐지만 경쟁자였던 [[신수근]], [[김수동]] 등에게 밀리고 끝내 [[1506년]] [[음력 9월 2일]] [[중종 반정]] 때 아우 [[임사영]]과 함께 반정군에게 붙잡혀 격살되었다. 향년 62세였다. 그의 시신은 서둘러 여주군 능현리 선영에 장사되었다. 그러나 임사홍이 죽은 뒤 20여일 후에 새 임금 [[조선 중종|중종]]에게 의금부가 아뢰기를 “임사홍은 선왕조에서 붕당과 결탁하여 조정을 문란케 하였으되 오히려 관전(寬典)을 입어 처단을 모면하더니 폐왕조에 이르러서는 그 아들 임숭재를 연줄로 하여 나인 [[장녹수]]에게 빌붙어 온갖 꾀를 다 부리며 악한 일을 하도록 부추겼고, 충직한 사람들을 해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며 임금을 불의에 빠뜨려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으니 그 죄는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적몰가산(籍沒家産)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ref>[{{웹 인용 |url=http://history.yj21.net/Theme/Theme.asp?BC_ID=b1291 |제목=임사홍] |확인날짜=2012-01-16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208200851/http://history.yj21.net/Theme/Theme.asp?BC_ID=b1291 |보존날짜=2013-12-08 |깨진링크=예 }}</ref> 결국 그는 부관참시되었고, 후에 누군가 시신을 다시 수습하여 매장하였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