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일치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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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이후, , [[개신교회]]인 [[루터교]], [[감리교]]. [[개혁교]], [[장로교]], [[성공회]] 등 교단들과 국가별 [[동방 정교회]] 교단들은 [[세계 교회 협의회]](WCC)를 결성 하면서 두 교파간의 일치 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동방 정교회]]는 세계 교회 협의회의 결성에 기여하기는 했지만, [[1961년]]에 비로소 회원교단으로 가입했으며, [[한국 정교회]]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협력교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교황 요한 23세]]가 즉위한 후에 참관인(observer) 자격으로 참관한 바 있다.
 
세계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가장 어려운 일이 [[개신교회]]와 [[정교회]]가 [[천주교회]]와 협력하는 것이었다. [[천주교회]]는 역사적으로 [[정교회]]와 이단 시비와 정교회 지역 약탈의 역사적 잘못을 시인하고 고백하지 않았고, 로마가톨릭 지역의 개신교회 교인 살해와 핍박에 대한 용서를 구한 적이 없는 상태여서 교회일치운동에 참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동방 정교회|정교회]]가 [[로마가톨릭|로마가톨]]릭의 약탈을 용서하고, [[루터교회]]가 천주교회가 자행한 [[개신교]] 교인 살해와 박해를 용서하므로, 로마가톨릭 교회의 세계 교회 일치 운동 참여의 문을 열어 놓아 1970년대부터 로마가톨릭도 교회일치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동방 정교회의정교회가 천주교를 용서===
 
===동방 정교회의 용서===
[[동방정교회]]가 로마가톨릭 교회의 정교회 지역 약탈과 방화를 용서하고, 함께 일치 운동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협력의 장을 열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교황 비오 9세]]가 [[1869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면서 힘을 얻기 시작했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이전까지는 방어적인 자세를 지니고 있어 큰 진전을 보기 힘들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는 종전의 방어적인 자세에서 [[동방 정교회]] 및 [[개신교]] 교파들을 '형제'라고 관용하는 자세로 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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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로마 가톨릭교회 국제위원회〉는 두 차례의 위원회를 구성, 최종 보고서와 2개의 합의선언을 내놓은 바 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1965년]]부터 [[대한성공회]]와 [[천주교]]간의 기도회를 개최하여 왔다.
 
=== 개신교의 종교개혁 박해에 대한대해 개신교가 천주교를 용서===
[[루터교회]]가 [[로마 가톨릭교회|로마가톨릭]]의 개신교도 살해와 방화, 박해를 용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교회일치를 촉구하였다. 이후 다른 개신교회의 참여 요청과 박해 용서의 성명이 발표되었다.
개신교측과 로마 가톨릭교회는 [[1967년]]부터 [[루터교]]와 공동으로 대화위원회를 구성해 [[1972년]]부터 [[199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합동위원회를 열어 [[1972년]] 말타 보고서를 비롯한 두 개의 공동보고서를 발표했다. 대희년을 앞두고 [[1999년]] [[로마 가톨릭교회]]와 [[루터교]]가 함께 발표한 《[[칭의|의화]] 교리에 관한 공동선언》은 지난 450여년간 두 [[기독교]] 교회들 사이에 이어져온 교리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교회 일치를 위한 새로운 장을 연 커다란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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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오순절 교회]], [[침례교회]]도 천주교회와 대화위원회를 구성해 보고서들을 발표해왔다.
 
=== 개신교회와 정교회의 용서 이후 천주교회의 참여 ===
천주교회는 제2차 바티칸회의를 통해 정교회와 개신교회의 용서를 바탕으로 교회일치 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아시아에서의 에큐메니컬 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