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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han Thanh Gian.jpg|섬네일|200px|판타인잔, [[1863년]] [[프랑스]] [[파리 (프랑스)|파리]]에서 촬영한 사진]]
'''판타인잔'''({{vie|v=Phan Thanh Liêm|hn=潘淸簡}}, [[1796년]] [[11월 11일]] ~ [[1867년]] [[8월 4일]])은 [[베트남]] [[응우옌 왕조]] 말기의 정치인, [[유학]]자, 외교관, 군인이다. [[자 (이름)|자]](字)는 담니으(Đạm Như, 淡如), [[호 (이름)|호]](號)는 르엉케(Lương Khê, 梁溪), 으억푸(Ước Phu, 梅川)이다. [[중국]]계 이주민의 자손으로 [[베트남]] 황제의 자문관까지 승진하였다.
 
[[민망|민망 황제 응우옌 푹 담]] 때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했으며 진사시에 합격했고, [[한림원]] 편수 등을 지내다가 한때 민망 황제의 노여움을 사 병사로 충군되어 백의종군하였다. 그러나 일반 병사로 참전하여 최전선에 나가 솔선수범하여 상관과 동료들의 존경을 받았다. 곧 복직하여 소치제 때 예부상서, 사덕제 때는 담임[[협판]][[대학사]] 겸 [[병부]][[상서]], [[추밀원]]대신 등을 지내고 황제의 자문관이 되었다. [[프랑스]] 유학파 출신으로 서구의 과학문명 기술을 불신하였으나 수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안남의 황제들이 [[천주교]] 선교사를 박해하자 프랑스는 선교사 학대를 구실로 [[1862년]] 남베트남을 침공하여 [[사이공]], 비엔호아, 빈롱을 점령했다. [[1862년]] [[5월]] 판타인잔은 [[프랑스]]가 더이상 베트남을 침략하지 않기를 원하는 뜻에서 딘(사이공 근처)과 딘통(定祥, 지금의 미토(渼湫)) 지역을 프랑스에 할양해주었다. 이는 남부 베트남 동부 지역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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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생애 ===
==== 출생과 가계 ====
판 타인 잔은 [[1796년]] [[11월 11일]] [[벤째 성]](平定省) 빈딘 근처의 시골 마을에서 중국계 이주민의 자손인 판 타인 응안(Phan Thanh Ngạn, 潘淸彦)과 럼 티 붓(Lâm Thị Bút, 林氏筆)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중국]]인으로 [[복건성]] 등양현(海澄縣) 출신이었으나 [[명나라]]가 멸망한 뒤 [[청나라]]에 반대하다가 [[베트남]]으로 망명하였다. 그의 선조들은 벤째 성 빈딘에 정착했고, 그의 어머니 역시 중국에서 망명한 [[복건성]] 출신 망명객의 후손으로 역시 중국계 혼혈인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었다.
 
조부 판 타인 탑(Phan Thanh Tập, 潘淸熠)의 대에까지는 순혈 [[중국인]]이었으며, 판타인탑이 [[벤째 성]]으로 이주하여 [[베트남]]인 여자인 후인 티 혹(Huỳnh Thị Học, 黃氏學)과 결혼하여 판 타인 응안을 두었다. 아버지 판 타인 응안은 군인 출신으로 [[응우옌 푹 아인]] 휘하의 수군에서 복무하다가 말단 관료를 역임했다.
 
==== 소년기와 청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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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료 생활 초반 ====
[[파일:Phan Thanh Gian 1860s.jpg|섬네일|140px|판타인잔]]
여러 벼슬을 거쳐 [[응우엔 왕조]] [[민망제]] 응우옌 푹 담 즉위 초 [[진사시]]에 합격하고, 남부 성의 과학담당 교수로 파견되었다. 이후 [[1840년]] [[투아티엔후에 성]](承天順化省)의 학교 교육담당 부관, [[1847년]] 성도(省都)의 검찰 부총장 등을 역임하고, 황제를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자문관이 직위에 기용되었다. 이때 [[민망제]]의 신임을 얻어 그는 빠른 속도로 승진하여 관리 중 2번째 서열까지 올랐으며, [[황제의 자문관]]이 되었다. 그러나 [[유교 윤리]]를 철저히 따르며, 황제에게 제국법령과 관행이 지니고 있는 결함과 단점을 조목조목 지적해 민망 황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민망제]]는 그의 직위를 박탈하고 강등시켰다가 병사로 종군케 하여 중부 [[베트남]] [[꽝남 성]](廣南省)의 하급 병사로 전투에 참여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저항하거나 반발하지 않고, 전투나 도적 진압 시 전방의 최전선에 나가 용기와 규율의 모범을 보였다. 이러한 행동으로 상관이나 동료들로부터 존경과 신망을 얻게 되었으며, [[민망제]]는 그를 복직시키고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민망제]] 사후에도 솔선수범과 성실성을 인정받아 그는 계속 조정의 고위직에 유임되었다.
 
==== 저술과 후학 양성 ====
[[민망제]] 시기에 [[한림원]] 편수(翰林院編修)를 지냈으며, [[소치제]] 때에는 [[예부]][[상서]]를 지냈다.<ref name="jungyou454">홍승표, 《중국유학의 남방 전파》(계명대학교출판부, 2005) 453페이지</ref> 또한 [[역조헌장류지]](歷朝憲章類志), [[대남실록]]의 편찬 작업에도 참여했다.<ref name="jungyou454"/>
 
학식과 고전에 능했던 그는 [[소치제]]와 [[사덕제]]의 신임을 얻어 각종 고사와 실록의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반광정(潘光定)과 반청간 등 등의 학자들은 대량의 경론 문장을 써냈다.<ref name="jungyou453">홍승표, 《중국유학의 남방 전파》(계명대학교출판부, 2005) 453페이지</ref>
 
[[성리학]]적 소양이 풍부했던 그는 수많은 문하생을 [[유학]]자로 길러냈고, [[과거 시험]]을 주관하였으며 왕의 자문관으로 [[중국]]과 [[베트남]], [[조선]], [[일본]], [[티베트]], [[몽골]] 등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고사를 인용하기도 했다. 또한 [[1856년]] 그는 [[중국]]의 역사서인 [[통감]]과 [[강목]]을 본따 총 53권의 [[흠정월사통감강목]](欽定越史通鑑綱目)을 편찬하였다.
 
[[소치제]] 즉위 후 국호를 [[대남 (베트남)|대남]]으로 고쳤으며 이때 그는 [[예부]][[상서]]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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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한 선교 이후 [[유교]]적 가치관과 제사를 거부하자 여기에 분노한 [[베트남]] 황제들은 [[선교사]]와 [[기독교]]를 박해하는 정책을 편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의 연락을 받은 [[프랑스]] 정부가 개입하면서 [[프랑스]]는 [[남베트남]]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와의 마찰로 일시적으로 물러갔으나 [[1860년]] [[프랑스]]가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자 [[대남 (베트남)|대남]]을 공격, [[사이공]]을 함락시킨 뒤 [[사이공]] 근처 [[미토]]와 [[쟈딘]] 지역을 함락시키고 계속해서 세력을 넓혔다. 판타인잔은 처음에 결사 항전을 주장하였다.
 
[[1862년]] [[프랑스]]군은 [[비엔호아]], [[빈롱]] 등을 점령했다. 그러나 각지에서는 민란이 발생하였고 [[후에]](順化) 조정은 [[통킹]] 지방의 반란으로 남부에 충분한 지원을 못하고 결국 [[프랑스]]에 밀리게 된다. 이때 그는 민란에 대한 강경 진압을 건의하였다. 이어 [[베트남]]에 침입한 [[프랑스]]군에 대해서는 항전을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과는 관계 없이 조정은 먼저 내란을 먼저 평정하기 위해 [[프랑스]]와 협상을 결정한다.
 
[[1862년]] [[5월]] 그는 [[대남 (베트남)|대남]] 황제의 전권을 위임받은 전권대신단의 한사람이 되어 [[임유협]] 등 베트남 대표단과 함께 [[프랑스]] 해군 [[루이 아돌프 보나르|보나르]] 제독 일행과 면담, 사이공의 [[프랑스]] 군함 위에서 협상하여 [[1862년]] [[6월 5일]] 제 1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한다. 판타인잔은 프랑스가 더이상 베트남 영역으로 진출하지 않기를 바라며 [[자딘]]과 딘통(定祥, 지금의 [[미토 (베트남)|미토]])을 할양해주었다. 이는 근대 [[베트남]]사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자 굴욕적인 조약으로 기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