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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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문신, 정치인, 성리학자
|종교= [[유교]]([[성리학]])
|배우자= 정실부인:정경부인 [[함양 박씨]](훈도 박숭부의 딸), 측실: [[양주 석씨]]
|자녀= 법자: ''[[이응인]]'', 서자 ''[[이전인]]''
|부모= 아버지 [[이번]], 어머니 [[경주 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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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적'''(李彦迪, [[1491년]] [[11월 25일]] ~ [[1553년]] [[11월 23일]])은 [[조선]]의 성리학자이자 정치가이다.
 
본관은 [[여주 이씨|여주(驪州)]]({[[여강 이씨|여강(驪江)]])}, 자(字)는 복고(復古), 호(號)는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시호(諡號)는 문원(文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경주시|경주]] [[양동마을]] 태생으로 유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문묘]] 종사와 [[조선]]왕조 최고 정치가의 영예인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6현 중 하나다한 분이다.(이들 6현은 이언적, [[이황]], [[이이]], [[송시열]], [[박세채]], [[김집]]이다.)
 
학문적으로는 [[조선]] 최초의 [[철학]]적 논쟁인 태극논쟁(太極論爭)을 벌여 [[성리학]]의 태두가 되었고, 이선기후설(理先氣後設)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는 사상을 확립해 [[이황]]에게 계승시켜주었으며, [[보물]] 제 586호로 지정된 수고본 일괄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겨 [[영남학파]]의 창시자로 추앙됨으로써 [[1610년]] [[문묘]]에 종사되었다.
 
정치적으로는 [[1513년]] 사마시와 [[1514년]]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판서]], [[예조판서]],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관찰사|경상도 관찰사]], [[대사헌]] 등 고위 요직을 역임한 뒤 종1품 [[의정부]] [[좌찬성]]과 원상(院相)에 올랐으며, 사후 [[1568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1569년 [[종묘]]에 배향되었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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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족도세계를 작성했는데, 이는 족보와 선조에 대한 것을 종이로 간략하게 표시한 것이다. 자신의 본가 부계쪽 족도세계, 자신의 조부의 처가 족도세계와 어머니 경주손씨의 족도세계, 그리고 소실 양주석씨 부인의 족도세계 등도 작성하였고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 서자 이전인과 서손 이준 ===
그의 서자 [[이전인]]은 정실이 아닌 측실 사이에 낳은 아들이고, 뛰어난 학행과 효심이 남달랐으나 서자라는 이유로 이언적의 대를 잇지 못했다. 이전인의 생모 양주석씨는 [[김포군]]만호 석귀동의 서녀였다.
 
[[1583년]](선조 16년) 변방에서 [[이탕개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병조]][[판서]] [[율곡]] [[이이]]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제안으로, 전쟁에서 공훈을 세우거나 군량미를 내면 서얼에게도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조선 태종|태종]]의 유언을 빌미삼아 서얼 차대에 집착했던 양반들의 반대에 부딛쳐 좌절되었다.
 
율곡 [[이이]]가 납속 허통 주장을 했는데, 이때 서얼 허통의 물꼬가 됐다. 바로 이 때 이언적의 서손자이자 [[이전인]]의 아들인 이준도 납속허통을 받아 자신과 후손들의 과거 응시 길을 열었다.
 
그러나 서자 신분으로 부사직을 역임하고 은퇴 후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서얼차대가 유독 심한 지역 양반들이 서원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면서 서얼들의 유향소나 서원 가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정에서의 허통은 이루어졌지만 삶의 기반인 지역 사회에서 거부당한 이준은 71세의 나이에 다시 청원서를 올렸다. 그러나 그의 절절한 호소는 그러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밖에도 그의 첩이었다가 다른 이에게 개가한 여성의 아들이 그를 찾아왔고 자신의 아들로 인정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 학문적 연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