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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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의 발발 ==
[[1636년]] [[12월 28일]] 청 태종이 이끄는 군대 약 10만이 압록강을 건너 남하하자 의주부윤(義州府尹) [[임경업]]은 백마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의 진로를 차단하고 기세를 꺾어 놓을 만반의 준비를 마쳐놓았다. '''하지만 청군은 모든 산성을 우회해서''' [[안주시|안주]], [[평양특별시|평양]]를 점령했고, 이후 1637년 1월 9일엔 개성에 도착했다. 그리고 숨 돌릴 틈 없이 수도인 한성을 향해 빠르게 진군하였다.
이 때 청군의 남하 소식을 듣고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로 도망치려고 했으나 청군이 강화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김포, 통진을 점령하는 바람에 강화도로 가는 길이 차단되었고, 결국 [[1637년]] [[1월 9일]] 밤, 강화도 보다 가까운 남한산성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 근왕병의 소집과 실패 ===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각 도에 잔 글씨로 써서 벌집을 만들려고 꿀벌이 분비하는 물질을 이용해 뭉친 글을 몰래 보내 근왕군을 모으려고 했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한성과 인조만을 노린 전격전을 전개했으므로 한성과 그 주변을 제외한 배후지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고 특히 삼남([[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지방이 건재했으므로, 여기서 근왕군을 편성해 산성을 포위한 청군을 역포위하면 전세를 유리하게 바꿀 수 있다고 판단했다. <ref name="jukk158">이정근,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158페이지</ref> 그러나 근왕군을 지휘할 책임이 있는 도원수(都元帥) [[김자점]]은 경기도 [[양평군|양평]]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각 도에서 올라오던 근왕군은 합류하지 못한 채 청군의 별동대에게 각개격파당했고 남한산성을 구원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