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호 (191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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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경상북도]] [[김천군]]에서 남면에서 출생하여 홀어머니 슬하의 그다지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서 자랐다.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금융조합 서기로 채용되어 직장 생활을 하던 중, [[만주]]로 이주하였다.
 
만주에서 [[태평양 전쟁]] 종전을 맞아맞은 뒤 [[김일성]]의 측근인 [[강건]], [[림춘추]] 등이 [[옌볜]] 지역에서 사업할 때 참여하였고, [[1946년]]에는 [[소군정]] 지역인 [[함경북도]] [[청진시]]로 들어갔다. 청진에서 제철기계공업사의 경리과장으로 근무하였고근무하였으며, [[함경북도]] 소비조합 기획부장을 거쳤다. [[한국 전쟁]] 때는 [[평양]]에서 조선소비조합 중앙위원회 기획부장에 오르는 등 경제 전문가로 활동하였다.
 
[[1957년]]에 공작원으로 남파되었으며, 기업체를 운영하면서 [[대구광역시|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61년]] 11월에 체포되었다. 공작원 활동 기간이 4년 가량으로 비교적 긴 편에 속한다.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무기징역형을[[1964년]]에 무기징역형 선고가 확정된 선고받아 장기수로 복역했다.
 
수감 기간 중에 전향을 권유받았으나권유받았다. 김종호의 [[김해 김씨]] 친척과 김천고보 동창 가운데는 성공한 인물들이 많아 회유도 있었고, 형과 조카딸이 김종호를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감옥살이를 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으나, 신념을 굽힐 수 없다며 전향하지 않았다.

[[1991년]]에 회복 가능성이 없는 노약자로 분류되어 약 30년 동안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허영철]]과 함께 출소하였다. 김종호는 가정이 북조선에 있어 마땅히 갈 곳이 없었으며, 고령에 건강도 좋지 않았다. [[양로원]]을 거쳐 인권운동가의 도움으로 거주지를 마련하였고, 출소 비전향 장기수 가운데 젊은층에 속하는 [[김창원 (1934년)|김창원]]의 간호를 받으며 생활하였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어 가족과 다시 만났다. 송환 3년 후인 2003년에 송환된 장기수 가운데 네 번째로 사망했다. 송환 직후 다른 장기수들과 함께 [[조국통일상]]을 수여받았고, 사망 후에는 [[애국렬사릉]]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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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 {{서적 인용
|저자=안영기 외 13인
|제목=신념과 의지의 강자들 - 비전향 장기수들의 수기 3
|발행일자=2003
|출판사=평양출판사
|출판위치=평양
|장=위인을 따르는 삶에 참애국이 있다 (김종호)
|꺾쇠표=예
}}
* {{뉴스 인용
|제목=다시는 뵈올 수 없게된 그 인자하신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