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엽 (승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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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글 →‎여성 계몽운동과 강연, 논설 활동: 서양식 의복은 확인되나 코르셋은 확인되지 않음. 출처가 필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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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7월]]부터는 오상순, 염상섭, 김억, 황석우, 나혜석 등과 함께 순수 문예지 「[[폐허]]」 동인으로 시, 소설, 수필 등을 발표했으나, 불온선전을 한다는 이유로 폐허지는 폐간되고 만다. 그해 말, 그는 직접 잡지 창간을 계획하였으나 [[3·1 운동]]의 여파로 총독부가 허가를 내주지 않아 실패하였다. [[1920년]] [[10월]] [[경성부|경성]] YMCA 청년회에서 여성교육과 사회문제에 대한 강연을 했으며, 이후 각지를 다니며 사회 문제와 여성문제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 그는 여자 교육의 필요성, [[참정권]]의 필요성, 여자의 사회 참여, 남자와의 동등한 지위 부여를 주장하였다.
 
<nowiki>귀국 직후 김일엽은 서양식 코르셋과{{</nowiki>[[틀:출처 필요|출처 필요]]<nowiki>}} 서양식 여성 양장의 도입을 주장하였다. 그는 칼럼과 기고를 통해 서양식 양장의 도입을 역설하였다. 그런데 김일엽이 </nowiki>[[1921년]] [[9월 21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부인 의복개량에 대하여 한 가지 의견을 드리나이다>라는 계몽성 글에, 요샛말로 표현하면 딴지를 걸고 동성인 여자를 형(兄)이라 칭하는 나혜석의 발칙한 칼럼이 <김원주 형의 의견에 대하여>였다.<ref name="gyemong"/>
 
이혼 후에도 그는 문필 활동을 계속하여 [[1921년]] 잡지 [[신민공론]]지의 동인으로 참가하고,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문예부 기자, [[매일신보]]의 기자, 월간 《[[불교]] (佛敎)》지 문화부장 등으로도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