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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로하시 테츠지, 공자 노자 석가, 심우성 역
* {{서적 인용 |ref=Renard| author=Renard, John |제목=101 Questions and answers on Confucianism, Daoism, and Shinto |publisher=Paulist Press |location=New York, NY |year=2002 |pages= |isbn=0-8091-4091-8 |oclc= |doi=}}
* 노자의 정치철학, 탁양현 지음
제1장. 노자와 정치
 
 
1. 정치에 관하여
 
 
인간존재의 삶, 그 자체가 곧 정치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선언은, 인간이 곧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과 다름 아니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출생의 순간부터 죽음의 순간에 이르도록 당최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니 실로 정치 안에서 태어나 정치 안에서 죽어가는 인간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저 먼 고대로부터 인간존재들은 늘 정치를 고민했다.
예컨대, 동양사회의 대표적인 고전으로서 자리매김 되어, 흔히 사서삼경(四書三經)이라고 일컬어지는 텍스트들은 죄다 정치를 논변한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를 부정하고 비판하며, 그런 정치적 속박과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했던 대표적 텍스트로서 노자나 장자 역시 그 대부분의 지면을 정치에 대한 논변으로써 할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서양사회라고 해서 별다를 게 없다. 서양사회의 전통을 대변하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텍스트들은 물론이며, 이후 후학들의 텍스트들 역시 대부분은 정치와 연관된 것들이다. 그래서 중세의 신(God)에 대한 천착 역시 결국은 정치의 측면으로 귀결되곤 한다. 신이라는 전지전능한 절대자의 이미지로서 현실세계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데 그 목적을 두기 때문이다.
서양사회에서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사유의 시도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코기탄스(Cogitans)의 선언 이후에나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 그 자체를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는 니체의 ‘삶 자체로서의 힘에의 의지를 목적하는 예술적 자아’로서의 위버멘쉬(Übermensch)의 선언 이후에나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데카르트를 근대사회의 개조로 삼으며, 니체를 현대사회의 개조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어쨌거나, 모름지기 정치는 현실세계의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 가장 정치답다. 정치를 드러나게 하는 온갖 수단들이 횡행하는 세계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이를수록 갖은 정치적 수단의 분량은 한없이 증대되고만 있다. 삶의 여건이 그만큼 고도화되고 복잡화된 탓일 것이다.
설령 그렇더라도 노자의 주장처럼, 정치는 되도록 삶의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정치의 역사라고 할 만큼, 실로 정치적일 따름이다. 그러한 가장 큰 까닭은 현실세계의 온갖 부득이(不得已) 때문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예컨대,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에 나타난 문제의식의 핵심은 천하무도(天下無道)의 상황에서 기인하며, 그 구체적인 내용은 쟁(爭)과 전(戰)의 사태다. 전은 일반적으로 국가처럼 큰 개체 간의 싸움을 의미한다. 그리고 쟁은 개인 단위의 작은 다툼을 의미하기도 하고, 전을 포함한 싸움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노자도덕경이 기술된 때에 그만큼 투쟁과 전쟁이 시대적 문제로 강하게 대두되고 있었으며, 이것이 노자도덕경의 저자에게도 중요한 시대적 문제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노자가 제시하는 것은, 체도(體道)한 통치자로서의 성인이 무위(無爲)를 본받아서 무위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무위란 곧 천지자연의 자연스런 도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는, 실제로 도의 작용이 있지만, 그 작동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은미하여서, 작동의 대상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 하는 방식, 즉 그러한 작용 자체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방식으로서 작동한다. 이에, 무위는 하나의 명석한 개념이라기보다는, 세속적인 경향들과 반대되는 광범위한 행위들로서 무사(無事), 무지(無知), 무욕(無慾), 무집(無執) 등을 대표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택용, 「노자의 무위에 대한 연구」, 󰡔동양철학연구󰡕 제72집, 2012, 128쪽.
 
천하무도는 말 그대로, 현실세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도리마저도 상실되어버린 부득이의 상황을 일컫는다. 그런 대표적인 상황으로서 응당 전쟁을 꼽을 수 있다. 순식간에 목숨까지도 잃게 되는, 전쟁터가 되어버린 시공간에서 무슨 도리나 이치를 따질 겨를이 있겠는가. 그런 상황이야말로 천하무도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 전쟁은 지극히 극단적인 상황이며, 일상적인 상황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현실세계에는 특별히 전쟁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그에 부응하는 천하무도의 상황은 비일비재한 것이 또한 사실이다. 예컨대, 저녁뉴스의 사건사고 보도를 접하다 보면, 당최 전쟁의 상황보다 그다지 나을 게 없는 현상들이 수없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한 천하무도의 상황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아무래도 현실세계의 실제적인 정치에 있다. 어쨌거나 정치는 인간존재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유지하며 지속하는 가장 기초적인 법칙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이상, 인간은 정치적 동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적이라는 표현은, 곧 정치적이라는 의미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노자의 철학사상을 대표하는 개념은 모름지기 도(道)다. 그러다보니 노자의 정치학이 추구하는바 역시, ‘스스로․저절로 그러하는[自然]’ 도가 실현되는 시공간이다. 그러한 도를 정치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노자는 무위(無爲)와 자연(自然)을 발언한다.
그런데 노자도덕경에서 드러나는 노자의 발언은, 민주정(民主政)을 형용하는 ‘정치적(政治的)’이라는 표현보다는 왕정(王政)을 형용하는 ‘통치적(統治的)’이라는 표현에 좀 더 부합된다.
하지만 그것이, 21세기에 노자의 정치철학을 새로이 해석하여 논술함에 있어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다. 다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여타의 제자(諸子) 정치학들이 그러하였듯이, 그 대상은 도를 체득한 성인(聖人)으로서의 제후(諸侯)나 제왕(帝王)에 한정된다는 특색에 대해서 인식할 필요는 있다.
그런 것이 흔히 노자의 정치학인 것으로 알려진, 직하황로학(稷下黃老學)에서 비롯되었다는 군인남면지술(君人南面之術)로서의 제왕학(帝王學)이다. 이러한 노자철학의 정치론을 흔히 무위지치(無爲之治)라고 일컫는다.
노자도덕경에서 드러나듯이, 무위에 관련된 표현들은 확연히 유위(有爲)나 인위(人爲)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다보니 혹자들은, 노자철학이 소극적이고 피세적(避世的)이며 심지어는 신비적이고 허무적이라고 파악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은, 노자철학의 현실사회에 대한 비판과 부정을 지나치게 편면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노자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측에서의 전통적인 이해나 해석 역시도, 지나치게 무위의 측면에만 편중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다. 그러다보면 유위철학들의 경우처럼, 무위철학이 또 다른 극단주의가 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삼현(三玄: 易․老․莊)철학의 바탕 위에서, 미래의 정치학적 시도로서 현위(玄爲) 개념과 그에 의한 현위지치(玄爲之治)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현실세계의 온갖 부득이를 넘어서서, 천지자연의 온 생명과 인간존재의 삶 자체에 대해 좀 더 포괄적으로 접근함으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해명코자 함이다. 그것이야말로 노자철학의 본의에 보다 부합된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노자도덕경의 내용이 실제로 실현된다고 해서, 현실세계의 정치가 돌연 완벽해지거나 완전해질 수 있으리라는 다소 허망한 희망이나 기대를 갖진 않는다. 인류의 역사를 되살필 때, 그런 허황된 희망이나 기대는 곧잘 피를 부르는 혁명이나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그 참상에 대해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역이나 논어의 내용이 실현된다고 해서 세상이 완벽해지겠는가? 물론 좀 더 나아질 수는 있을 것이다. 성경이나 불경의 경우도 그러하며, 방법서설이나 자본론의 경우도 그러하다.
나아가 지금 여기에서 현실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실제적인 텍스트로서의 헌법의 경우는 어떠한가? 어느 나라의 헌법이든, 헌법은 애당초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텍스트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실제로 명문화된 바에 따라 강제적으로 실현되고 있다. 그러니 헌법의 내용을 완벽에 가깝도록 구성한다면, 현실세계 역시 완벽해질 것이라는 상상을 해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 어디에도 그런 완벽한 헌법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나마 작동하고 있는 현행의 헌법을 보다 적극적으로 실현한다고 해서, 현실세계가 많이 나아질 것 같지도 않다.
어쨌거나 한 권의 책은, 단지 한 권의 책일 따름이다. 한 권의 책으로 인해 세상이 좀 더 그럴듯해지고 나아질 수는 있다. 그러나 한 권의 책으로써 세상 자체를 바꿀 수는 없는 법이다. 왜냐하면, 천지자연은 제가 지닌 본래의 원리를 좇아 작동할 따름이며, 인간존재가 그것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데는 결국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상 그것은 한계가 아니라 이 세상이 유지되고 존속되는 원리 그 자체이며, 다만 천지자연마저도 자의적으로 조작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지나치다보면, 자칫 한계로서 인식하게 되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다보니 저 먼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도록, 그러한 한계를 넘어서보고자 온갖 억지를 부려보기도 하지만, 그런 억지스런 조작들이 횡행하며 작동할수록,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들은 좀 더 가혹한 고통의 나락으로 내몰릴 따름임을, 역사적 체험으로써 체득케 된다.
만약 세상의 근원적인 원리 자체를 바꾼 책이 있었거나, 그런 책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노자처럼 ‘세상 자체로써 세상을 살피고[以天下觀天下]’, 장자처럼 ‘세상을 세상 자체에 담아서[藏天下於天下]’, 세상의 본래적인 원리 그 자체에 지극히 충실한 텍스트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유방식에 바탕을 둔 노자나 장자 역시도 세상을 바꾸기에 역부족이었음은, 이미 역사로써 검증된다. 애당초 그러한 사유방식으로써 기술된 텍스트들마저도 그러한데, 하물며 여타의 텍스트들이야 굳이 말할 나위 있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온갖 노력들이 죄다 무의미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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