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남문: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그림:Jeonju_Pungnam-mun.jpg|200픽셀|썸네일|풍남문]]
 
'''풍남문'''(豊南門)은, [[대한민국]]의 [[보물]] 제308호로, [[조선]] 때의 유적이다.
종 목 : 보물 제308호
 
1963년 1월 21에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전라북도]] [[전주시]]에 위치해 있다.
명 칭 : 풍남문(豊南門)
 
조선시대(朝鮮時代) 관찰사(觀察使)의 소재지(所在地)였던 전주에는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城郭)이 초기부터 있었으며, 그 성곽에는 동서남북(東西南北)에 각각 문(門)이 있었는데 [[조선 선조|선조]](宣祖)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때에 모두 파괴되었다.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성곽과 성문이 다시 수축(修築)된 것은 [[조선 영조|영조]](英祖) 10년(1734)이며 이때 남문(南門)을 명견루(明見樓)라 하였다. 그러나 명견루는 영조 43년(1767) 큰 화재로 불타버렸다. 현재의 문루는 그 이듬해에 당시의 관찰사(觀察使) 홍낙인(洪樂仁)이 재건한 것으로 풍남문(豊南門)이란 이름도 이때 붙인 것이다. 그후 [[조선 순종|순종]](純宗) 융희(隆熙) 원년(元年)(1907) 도시계획의 일환(一環)으로 성곽과 성문은 모두 철거되고 이 풍남문만 남게 되었다.
수량/면적 : 1동
 
지 정 일 : 1963.01.21
 
소 재 지 :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2가 83-4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전주시
 
조선시대(朝鮮時代) 관찰사(觀察使)의 소재지(所在地)였던 전주에는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城郭)이 초기부터 있었으며, 그 성곽에는 동서남북(東西南北)에 각각 문(門)이 있었는데 선조(宣祖)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때에 모두 파괴되었다.
 
성곽과 성문이 다시 수축(修築)된 것은 영조(英祖) 10년(1734)이며 이때 남문(南門)을 명견루(明見樓)라 하였다. 그러나 명견루는 영조 43년(1767) 큰 화재로 불타버렸다. 현재의 문루는 그 이듬해에 당시의 관찰사(觀察使) 홍낙인(洪樂仁)이 재건한 것으로 풍남문(豊南門)이란 이름도 이때 붙인 것이다. 그후 순종(純宗) 융희(隆熙) 원년(元年)(1907) 도시계획의 일환(一環)으로 성곽과 성문은 모두 철거되고 이 풍남문만 남게 되었다.
 
풍남문은 그후 종각(鐘閣), 포루(砲樓) 등이 일부 헐리고 지면(地面)이 묻히는 등 그 옛모습이 크게 훼손(毁損)되었는데 지난 1978년부터 3년간의 보수공사로 다시 그 원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아래층 내부에 전후 두줄로 4개씩 세운 기둥이 그대로 연장되어 위층이 변주(邊柱)로 되는데 이러한 기둥배치는 우리나라 문루건축(門樓建築)에서는 희귀(稀貴)한 양식이다.
 
출처 : 문화재청(http://www.cha.go.kr)
 
[[분류:대한민국의 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