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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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일]], 김영삼은 [[일본군 위안부|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물질적 보상을 일본측에 요구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히고 그에 대한 보상은 내년부터 정부예산으로 추진하라고 지시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3/1753752_6127.html 김영삼 대통령, 종군위안부 문제 정부예산으로 보상] mbc뉴스데스크 1993-03-13</ref> 이어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그는 "[[일본]]측에서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며 물질적 보상문제는 필요하지 않다"면서 그런점에서 "도덕적 우위를 가지고 새로운 한·일 관계 정립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최근 국민들이 변화와 개혁에 대해 큰 관심과 기대를 갖고 있어 그때그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만 너무 혁명적인 인상은 주지 않도록 속도를 조정하도록 하라"고 부처에 지시하였다.[[5월 13일]] 5·13특별 담화에서 그는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했다. 그 뒤 반공주의 극우 세력의 반발이 심화되자 [[5.18]]과 [[12.12]] 군사반란 및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처벌문제에 대해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라고 발언하여 결말을 뒤로 미루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3/1755264_6127.html 김영삼 대통령, 광주 민주화항쟁 관련 특별담화문 발표] 1993.5.13 mbc뉴스데스크</ref>
 
1995년 [[6월 3일]]에는 전국연합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 전국 36개 단체가 모여 부당한 공권력 반대와 노동인권 보장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를 열었으며 시민, 학생 등 1만여명,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김영삼 대통령 망언 규탄 및 노동인권 보장 촉구 국민대회"를 갖고 노동탄압을 즉각 중지할 것을 정부에 촉구하기도 하였다.<ref>[http://www.demos.or.kr/ilji/viewbody.html?code=agenda&page=3&number=4798&keyfield=event&key=%B1%E8%BF%B5%BB%EF 김영삼 대통령 망언 규탄 및 노동인권 보장 촉구 국민대회] {{웨이백|url=http://www.demos.or.kr/ilji/viewbody.html?code=agenda&page=3&number=4798&keyfield=event&key=%B1%E8%BF%B5%BB%EF# |date=20021030175405 }} 성공회대학교 사이버NGO자료관 1995-06-03</ref> [[6월 22일]]에는 경제부총리 [[이경식 (1933년)|이경식]]을 불러 [[금융실명제]]를 빨리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7월]] [[율곡비리]] 사건을 조사하여 비리 관련자들을 처벌하였다.[[8월 12일]]에는 긴급명령을 발표,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통해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을 통해 해야 한다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하였다.
 
=== 집권 초기 및 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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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0월, [[일본]]의 [[일본 총무청|총무청]] 장관인 [[에토 다카미]]는 "일본은 식민지 시절에도 한국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다"라는 발언을했고 이후 [[1996년]]에는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도 "[[독도]]는 일본영토"라고 발언하는 등 일본의 정계에서 식민지 지배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정당화하는 발언들이 끊임없이 나오자, 이에 [[김영삼]]대통령은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ref>{{뉴스 인용 |url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11800209107002&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5-11-18&officeId=00020&pageNo=7&printNo=23029&publishType=00010 |제목=日 불쾌감 표시 |출판사= [[동아일보]] | 날짜 = 1995-11-18 |쪽=7}}</ref> 해군참모총장으로부터 한·일 해군력의 현실태를 보고 받고는 이지스함 2척 보유 정책을 추진한다.(1995년 5월 2척 계획추진에서 시작, 1998년 1월 31일 국가부도로 한국형 구축함 사업 예산 전액삭감, 이후 김대중 정부 때 사업 부활하면서 3척 계획)
이후에도 한일 관계는 순탄치 않은 상황에 놓여 있는 와중에 97년 겨울, [[IMF사태]]가 터지자 한국은 일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이 간섭해서 지원을 포기했다하는 사람들도 있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IBMkkT3Qalk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한국 IMF로 가다.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830677 냉탕·온탕 오가는 한일관계 'MB式' 해법은 ] [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8&no=634841샤덴프로이데 (schadenfreude)]{{깨진 링크|url=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8&no=634841%EC%83%A4%EB%8D%B4%ED%94%84%EB%A1%9C%EC%9D%B4%EB%8D%B0 }}</ref>
 
=== 한-유럽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