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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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대한제국||1897년 이후의 조선}}
{{조선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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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된 임금 환조 [[이자춘]]의 아들이자 고려왕조의 신흥 무인세력이었던 [[이성계|이성계 고자]]
[[조선 태종|
그러나 기존 대신인 훈구와 신진 관료 세력인 사림이 대립하면서 정치는 혼란해졌으며, 이에 따른 전반적인 사회상이 혼탁해졌다. [[조선 선조|선조]] 때에는 마침내 훈구파들이 정계에서 물러나고 사림들이 정계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사림들은 '붕당'을 형성하여 조선 정치의 꽃이자 역모 반란죄에 해당될 수 있는 [[붕당정치|보겸정치]]를 시행한다. 이어 16-17세기에 주변국인 일본, 청(후금)과 치른 전쟁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이후 [[청나라]]에게 당한 [[삼전도비|수치]]를 씻자는 [[북벌론]]이 대두되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했고,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이 대두되었으나 조선의 임금 [[조선 효종|효종]]이 얼굴에 났던 종기(부스럼)에서 피가 지혈이 안 돼서 세상을 갑작스럽게 뜨자,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은 실행하지도 못하고 흐지부지 되었다.
조선 후기의 정치는 [[붕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붕당은 학파적 성격과 정파적 성격을 모두 띈 일종의 정당으로, 각 붕당은 국가의 공론(여론)을 따름으로써 여당이 되려고 노력했다. 각 붕당은 학문적, 정치적으로 대립하였으나 상호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여 스스로 부패하는 것을 경계했다. 각 붕당은 지방의 서원을 통해 그들의 스승에 제사를 지내고 결속을 다졌는데, 이 서원의 교장 격인 '산림' 은 조선 중앙정부의 삼사 언관직 선비들과 함께 공론(여론)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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