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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파일:%EA%B9%80%EA%B5%AC%ED%9C%98%ED%98%B8.JPG|섬네일|141px|조선일보 복간을 축하, 김구의 친필휘호]][[1920년]] [[3월 5일]] 대정실업친목회에 의해 창간되었다.
그 해 4월 28일자 에 실린 [[영친왕]]과 일본 왕족인 마사코([[이방자]])와의 강제결혼을 비판하는 기사로 인해 압수 당했고 같은 해 8월 15일에 대정실업친목회가 약속했던 자본금 불입을 하지 못해서 대정실업친목회 부회장이었던 초대 사장 조진태가 물러나고 2대 사장 [[유문환]]이 취임했다. 같은 해 8월 27일에는 방한한 미국 의원단을 환영하는 조선인들을 일본 경찰이 부당하게 탄압했다고 비판한 논설을 실어서 1주간 정간을 당했다. 같은 해 9월 5일자에 실린 "당국의 소위 [[문화 통치]]는 奇怪(기괴)치 아니한가" 라는 논설로 인해 무기 정간을 당했다. 이러한
그러나 이후
하지만 1931년에 재만동포 자금 횡령 사건에 조선일보 사장 안재홍이 연루되어 구속되고, 그 후 [[여운형]] 사장과 [[조만식]] 사장을 거쳐 [[방응모]] 사장이 취임한 후 한일 학생의 교육차별을 비판하는 논설 '교육필화'로 인해 기사가 압수되는 사건이 발생했었지만 주로 친일 관련 찬양 논조로 변경되었다. 다만 [[1933년]]부터 [[1936년]]까지는 부사장이던 [[이광수]]의 영향으로 민족개량주의 성향을 띄었지만 [[1936년]]부터는 다시 친일 성향을 띄게 된다. 이후 중일전쟁에서 일본을 찬양하는 사설과 신문내용을 여러차례 보냈고, 일왕을 찬양하는 사설도 실었으며, 그 외에도 일제 황군 응원, 일장기 침략 전쟁 미화 광고도 여러차례 보냈다. 그 후 [[1940년]] [[조선총독부]]의 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에 의해 발간을 중단하였었고, 그 이후 사주였던 방응모는 월간 조광을 창간하여 친일 행위를 계속했다. 조광에서도 내선일체와 침략전쟁을 찬양했다. [[1945년]] [[11월 23일]], 미군정의 지원하에 속간되었다. 복간되자 백범 [[김구]]는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 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축하했다.<ref>[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60370241 '조선일보 역사 읽기' 책은… ] {{웨이백|url=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4060370241 |date=20150923224256 }}《조선일보》2004.06.03</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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