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 (147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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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1년]] 순변사(巡邊使)에 임명되어 도원수(都元帥)를 겸임하여 출정, [[건주위]](建州衛) [[여진족]]을 토벌하고 되돌아왔다.
 
그 공로로 국왕이 그를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하려 하였으나, [[이조]][[판서]] [[류관 (조선)|유관]](柳灌)이 장리의 사위로서 서경을 받을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ref name="jangri001"/> 고종사촌인 [[유인숙]] 역시 그의 병조판서 임명을 반대한 일이 있었다. 이기는 이를 잊지 않았고, 후일 이로 인하여 [[유관]]과 [[유인숙]]은 보복을 당하였다. 국왕의 신임과 이언적(李彦迪)의 주장으로 형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병조판서로 발탁되었다.<ref name="jangri001"/> 그해 [[7월]] 고종사촌인 [[유인숙]]이 이조판서인 점을 들어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ref>중종 98권, 37년(1542 임인 / 명 가정(嘉靖) 21년) 7월 13일(신유) 1번째기사 "병조 판서 이기가 사직을 건의하다"</ref>
 
1542년 [[4월]] 경연특진관을 겸하고 [[8월]] [[의정부]]우찬성이 되었다. [[9월]] 지경연사로 경연에 입시하여 학문에 힘쓸 것과 관리 임용에 대한 대신들의 책임을 강조하였다.<ref name="gwan">중종실록 99권, 중종 37년(1542 임인 / 명 가정(嘉靖) 21년) 9월 24일(신미) 1번째기사 "이기가 학문에 힘쓸 것과 관리 임용에 대신의 책임을 아뢰다"</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