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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발성의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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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발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는데, 현재의 [[경상남도]] [[김해시]]가 수도였던 [[가락국]]이 이후에도 100년 이상 존재하다가 [[532년]]에 멸망하였고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에서 신라 유물이 많이 출토된데다 [[경주]]에서의 지리적 접근성을 고려할 때, [[낙동강]]의 동쪽에 위치한 [[부산광역시]] [[동래구]]나 [[부산진구]] 일대를 종발성으로 보는 견해가 상당하다.
한편 '''종발성'''(從拔城)이 북큐슈의 고대 국가인 '''축자국'''(築紫國)을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다.[https://www.youtube.com/watch?v=6GoGqvsa45k] 從('''따를''' 종), 拔(뺄 '''발''')이 '딸발/달바르'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築(쌓을/'''담''' 축), 紫('''보라'''/자주 자)는 '담보라'로 풀이할 수 있다. 從拔과 築紫이 실제로 '닮브라'라고 불리는 지명을 표기하는 다른 방식이라는 것이다. 일본서기 웅략천황 8년(464)에 "고구려왕이 즉시 군병을 일으켜 '''
[[광개토왕릉비]]에 기록된 왜(倭)의 실체, 왜와 가야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이는 광개토왕릉비문 중 판독 가능한 부분에서 정치·군사적 세력으로서의 [[가야]]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점과 《[[일본서기]]》의 [[369년]] 및 [[382년]]의 기사([[목라근자#개요|목라근자]]를 참고할 것) 등이 원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신라]]를 중심으로 기술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기록된 가야사의 내용이 단편적이고 빈약해서 이 시기([[4세기]] 후반 ~ [[5세기]] 전반)의 가야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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