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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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참고|공산주의|고려공산청년회}}
[[1921년]] [[3월]] 박헌영은 [[고려공산청년회]] [[상하이|상해]]지회의 비서가 되었다. [[1921년]] [[5월]]에는 [[김만겸]] 등이 이끄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게 되었다.<ref name="동아"/><ref>[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8b3734a 박헌영 - Daum 백과사전<!-- 봇이 붙인 제목 -->]</ref> 이후 [[공산당]]의 열성적 조직원으로 활동하여 '''가장 위대한 영도자'''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ref name="강준만 57">{{서적 인용 |저자=[[강준만]] |제목=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권 |꺾쇠표=예 |날짜=2004-04-03|출판사=인물과사상사|출판위치=서울|id={{ISBN|89-88410-89-0}}}} 57페이지</ref> 한편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후원을 받아야 조선을 해방할 수 있고 조선에 소비에트정부를 수립하여 소련의 가맹공화국으로 되여야 한다' 는 주장을 했다가 [[대한민국임시정부|임시정부]]를 지키던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 [[내무부|내무총장]] [[김구]]의 분노를 사, 눈밖에 나기도 했다고 한다.<ref>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uid=118217&table=global&level_gubun=all&mode=search&field=nic2&s_que=qaz&start=330</ref><ref group="주해">박헌영과 김구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하였다.</ref>
 
[[고려공산당]]이 운영하는 사회주의연구소의 직원으로도 활동하던 중 [[상하이]]로 유학온 [[주세죽]]과 결혼했다. [[1921년]] [[8월]] [[베이징]]에서 열린 고려공청회 중앙총국이 결성되는데 참석했고, 곧 고려공청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22년]] [[3월]] 박헌영은 고려공산청년회 제2차 중앙총국 회의에서, 공청회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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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이후 남한에서의 정치활동 ===
* [[1945년]] [[8월 15일]] 8.15 해방이 되자 '위대한 박헌영선생이여 빨리 나오시라'는 격문이 돌았다. 일부에서는 박헌영이 자작으로 붙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 박헌영은 [[8월 17일]] 벽돌공장을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와, [[8월 20일]] 명륜동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열고 '8월 테제'를 발표하였다. 박헌영은 [[장안파]]에서는 [[홍남표]], [[노동우]], [[최원택]]을, [[여운형]]파에서는 [[이강국 (정치인)|이강국]]과 [[최용달]] 등을 자기 진영으로 끌어냈으며, [[건준]]에서 다수의 장안파를 제거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장안파는 박헌영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결국 [[1945년]] [[8월 24일]] 해제되고 말았다. 박헌영은 [[9월 3일]]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ref>{{서적 인용 |저자=[[강준만]] |제목=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권 |꺾쇠표=예 |날짜=2004-04-03|출판사=인물과사상사|출판위치=서울|id={{ISBN|89-88410-89-0}}}} 57~58쪽</ref>
* [[1945년]] [[9월 20일]] 박헌영은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란 테제를 통해 혁명노선을 표명하고 있었다.<ref>[http://weekly1.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9/13/2006091377064.html <nowiki>[</nowiki>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6)<nowiki>]</nowiki> 신익희]</ref>
*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자 독립촉성중앙회에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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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12월 30일]] [[김구]]와 임정세력이 주도하여 결성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 위원회(信託統治反對 國民總動員 委員會)」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상임위원)이 되었다.<ref name="bantak"/>
* [[1946년]] [[1월 5일]] [[조선공산당]] 당수로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 내용을 지지하며 조선은 현재 민주주의 변혁 과정에 있다고 말했는데, 이 내용은 다음날 [[조선인민보]] 등에 보도되었다.
* [[1946년]] [[2월 15일]] [[여운형]], [[이승엽]], [[김원봉]] 등과 함께 [[민주주의민족족]]의 공동의장단 의장으로 추대되었다.<ref>{{서적 인용 |저자=[[강준만]] |제목=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권 |꺾쇠표=예 |날짜=2004-04-03|출판사=인물과사상사|출판위치=서울|id={{ISBN|89-88410-89-0}}}} 211쪽</ref>
* [[이승만]]이 [[공산주의]]에 대한 비난, 독설을 계속하자 그는 [[이승만]]을 향해 "[[독재]]적인 것을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원칙을 세우자"고 주장하였다.<ref>대한민국의 기원(이정식, 일조각, 2006) 141페이지</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