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촌리 학살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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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촌리학살사건(水村里虐殺事件)'''은 [[1919년]][[4월 5일]], [[3·1운동]]의 주모자를 색출한다는 구실로 일본군이 수촌리 일대를 방화하고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수촌리는 현재의 [[화성시]] 장안면 수촌리로, 당시 일본군에 의해 42호중 38호가 불에 탔다. 마을 전체가 몰살당한 수촌리의 실상이 입소문을 타고
서울까지 퍼졌으나, 일제는 이 사실을 수긍하지 않았다. 하지만 [[4월 16일]]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영국 공사관 커티스, 프리랜서 기자인
테일러가 수촌리를 직접 방문함으로써 전 세계에 알려졌다. [[4월 18일에는18일]]에는 [[세브란스병원]] 의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스코필드]]가 다녀갔고 4월 19일에는 영국 영사 로이즈와 수원 지방 교회를 관리하는 노블 감리사를 비롯하여 케이블, 빌링스, 벡크 등 감리교 선교사들이 다녀갔다.
수원 지방 교회를 관리하는 노블 감리사를 비롯하여 케이블, 빌링스, 벡크 등 감리교 선교사들이 다녀갔다.
이들을 통해 방화 사건의 진상은 세상에 알려졌고 수촌리는 3·1운동과 관련한 민족 수난의 현장으로 기록되었다.
이 사건을 저지른 일본은 '''[[제암리학살사건]]'''까지 저지르는 만행을 자행했고,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이 직접 목격하지 않았다면 역사속에서 묻혀버릴수도 있었던 사건이었다.